[원포인트 시사 레슨]뭉크 著 ‘위험한 민주주의’의 렌즈로 읽다
10월 5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열린 ‘검찰개혁·사법적폐 청산 촛불문화제’ 참가자들의 손팻말. [뉴스1]
지난해 번역 출간된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국 사태’로 드러난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꿰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지지하는 ‘친조(親曺)’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반조(反曺)’ 세력이 서로를 민주주의의 적이라며 존재론적 투쟁을 벌이는 모습을 예견한 것 같다.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청와대 또는 검찰을 민심을 왜곡하는 집단이라고 몰아세우는 것 또한 그대로다. 한때 자기편이라고 여기던 인물이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인격모독을 서슴지 않고, 원래부터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에 대해선 아예 ‘마녀’로 낙인찍어 소셜미디어에서 조리돌림하기 바쁘다.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야스차 뭉크. [gettyimages]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분명히 밝힌다. 이 책에는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하야 촉구 촛불집회를 포퓰리즘에 맞서 자유민주주를 지켜낸 성공 사례로 3쪽에 걸쳐 소개한 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성공적으로 끌어내린 일은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옹호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부패하거나 포퓰리즘에 호소하는 정부의 권력 공고화를 막기 위해, 시민들은 민주주의적 규칙과 규범의 위반을 적발해야 한다. 포퓰리스트가 전체 국민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리로 나와야만 한다. 권위주의적 집권자의 동맹자들과 아첨꾼들에 대한 경멸이 아무리 커도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집권 세력의 몇몇 인물들에 대한 실체를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뭉크는 대규모 집회 자체를 포퓰리즘의 증좌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사회학자 프란체스카 폴레타의 책 제목 ‘자유란 중단되지 않는 집회(Freedom Is an Endless Meeting)’를 인용하면서 권력가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규범을 훼손하는 일에 맞서는 집단적 저항은 결코 중단돼선 안 된다고 역설한다. 물론 그러한 집회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가 기존의 법과 제도를 자신들 입맛에 맞게 고치려 할 때 맞서는 것을 말하지, 그런 행보를 부추기고 지지하는 친정부 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위험한 민주주의’는 냉전 종식 이후 ‘역사의 종언’을 운위하며 승승장구할 것 같던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한 징후를 포퓰리즘의 부상에서 찾는다.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며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대놓고 훼손하는 러시아의 푸틴, 터키의 에르도안, 인도의 모디, 헝가리의 오르반, 폴란드의 카친스키, 미국의 트럼프 같은 권위주의적인 포퓰리스트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사태를 말한다.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와 국민 자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는 뿌리가 다르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이 둘의 결합은 특수한 기술·경제·문화적 조건 아래 우연히 이뤄졌는데, 250년 넘는 역사에서 놀라운 상호보완성을 발휘했다. 대의제 민주주의로 국민 자치를 실현하되 엘리트가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제도(사법부, 중앙은행, 전문 관료기구, 국제기구, 언론)를 통해 개인의 권리가 대중적 변덕에 의해 침해받는 것을 성공적으로 견제해왔다는 것이 뭉크의 분석이다.
이런 이인삼각 체계가 신화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민주주의 체제 국가들의 고도성장이 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냉전 체제 붕괴 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며 이 신화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실업률이 치솟고 사회적 안정 장치가 무너지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체제에 대한 반감과 부정으로 표출됐다.
소셜미디어는 이런 경향의 가속화를 부추기고 있다. 전통적 의제 설정의 문지기(게이트키퍼)들이 가진 역할이 약화되면서 공론 형성의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강해졌다. 이로 인해 선정적인 뉴스가 급속하고도 광범위하게 퍼지는 부작용과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려는 ‘반향실(echo chamber) 효과’가 심각해졌다. 바로 가짜뉴스의 남발이다.
이는 같은 정체성을 지닌 ‘우리’와 그렇지 못한 ‘그들’을 가르는 정체성 정치의 강화를 가져왔다. 외국인을 혐오하는 민족주의와 사회적 소수자를 배척하는 권위주의가 진즉에 이를 졸업했다고 자부해온 서구사회에서 다시 유행성 독감처럼 퍼지고 있는 이유다.
비민주적 자유주의와 반자유적 민주주의
다만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포퓰리즘 발현 양상엔 차이가 발생한다. 서유럽이나 미국은 자유주의적 제도의 힘이 너무 비대해져 국민의 민주적 의사 표현의 창구와 통로가 위축되고 협소해지고 있다. 비민주적 자유주의다. 세계화가 가속화하면서 경제정책이나 국제문제와 관련해 국민의 뜻과 동떨어진 결정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치 문제가 법원의 사법적 판단에 의해 결론 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국민의 대표로 이뤄진 입법부의 기능은 과거에 비해 크게 약화됐다. 소외감을 느끼는 국민의 불만이 증대하면서 포퓰리즘의 독초가 자라게 되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나 트럼프 집권 같은 예측불허의 사태가 발생하게 됐다. 그렇게 집권한 포퓰리스트는 국민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적 제도를 약화시키거나 무력화하는 데 집중한다.
반대로 자유주의적 제도의 역사가 짧거나 취약한 남미와 동유럽에선 민주주의의 미명 아래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규범 자체를 무너뜨리려 한다. 반자유적 민주주의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중앙은행 같은 독립된 정부기관을 권력에 종속시키고, 국영 및 공영 방송국을 장악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리며,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금지시키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거 제도를 바꾸려 기도한다.
이는 오르반, 카친스키, 트럼프가 시도하는 것이며 푸틴과 에르도안은 이미 이를 통해 장기집권의 문을 연 독재자(strongman)의 길을 가고 있다. 우파에만 적용할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치프라스 정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마두로 정부에서도 ‘더 많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문제들이다.
조국 반대 = 기득권 옹호 = 친일파의 단순 논리
10월 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하야 범국민투쟁대회’ 참가자들의 손팻말. [뉴스1]
조국 지지 촛불집회에선 이런 징후가 뚜렷이 감지된다. 자유주의적 제도로 검찰이나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불만을 발판 삼아 기성 제도를 전면 부인하는 듯한 발언을 일삼는다. 또 정부나 자신들의 목소리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는 언론과 지식인을 기득권 세력에 빌붙은 ‘국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여론 매타작을 가한다. 조 장관에 반대하는 세력을 ‘비민주적 자유주의’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뜬금없이 ‘친일파’ 딱지도 등장한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대대로 친일파였다는 대중 정서를 토대로 조국 반대 세력은 기득권 옹호 세력이고, 따라서 일본 아베 정부에 부역하는 ‘친일파’라고 주장한다. 조 장관이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시절 선동적 언사로 반(反)아베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는 이유로 ‘반조=친일파’의 단순 논리를 전개한다.
이에 대해 뭉크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 엘리트들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포퓰리스트들이 반드시 언급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들이 부패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외세와 영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공격 수단이 소셜미디어다. 소셜미디어는 2016년 촛불집회 때 흔들리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주요 동력이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뭉크가 지적했듯이 소셜미디어는 독재 전복에 효율적인 무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파괴하는 데도 효과적인 흉기가 될 수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이를 통해 ‘표현의 도덕적 독점’을 꾀하고, 기성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를 부추기며, 신념이 같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각각 국민과 비국민으로 가른다.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은 차별화가 쉽지 않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심화하려는 의도를 너무 쉽게 포퓰리즘으로 격하한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다. 2019년 촛불집회에 나서는 사람을 모두 포퓰리스트로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들의 상당수도 이를 의식해 ‘조국 수호’가 아니라 ‘검찰개혁’의 대의를 앞세운다.
민주주의자냐, 포퓰리스트냐를 구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여럿이다. ‘생각이 다른 것’과 ‘생각이 틀린 것’을 동일시하느냐 아니냐일 수도 있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상호견제 및 보완성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일 수도 있다. 2016년과 2019년을 비교할 때 어쩌면 가장 큰 차이는 정치권력을 쥔 자 편에 서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일 것이다. 2016년 정치권력을 쥔 자 편에 선 사람들을 ‘친박’(친박근혜)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뭐라 불러야 할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0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