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포스텍 교수
우선 노벨상이 대체로 20, 30년 전 연구에 대한 수상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이번에 화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요시노 아키라 교수의 수상은 1985년에 발표한 특허에 대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 이전, 경제의 최성기였다. 일본 기업들은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고 연구개발 투자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명문대 석사학위를 받은 인재들이 주요 기업 연구소로 갔다. 이들은 일본의 독특한 논문박사제도를 통해 기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수가 됐다.
비슷한 시기 한국은 어려운 처지였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연구개발비 투자는 수십 배 차이가 났다. 1970∼90년대 초 연구로 수상하는 최근 노벨상에서, 한국이 아직 수상자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19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투입된 연구 인력과 연구비를 계산해보면 양국 차이는 100배를 훌쩍 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의 노벨상 수상은 남루했던 우리의 지난날들을 되새겨주는 것이지, 현재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최근 기초과학연구원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내는 우리 과학자의 수는 이제 일본과 겨룰 만한 수준이다. 이들의 성과가 축적되고 성숙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일본의 미래는 어둡지만 한국의 미래에는 아직 기회가 있다. 일본은 오랜 불황으로 기업 연구소가 쇠락했다. 정부의 기초연구 투자는 정체됐고 대학 교원 수도 인구 감소와 더불어 줄었다. 지난해 일본 문부과학성의 공식적인 진단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기업 기초연구의 쇠퇴, 이공계 기피, 대학 연구력 저하를 그 원인으로 꼽고 있다.
혹자는 한국 정부 차원의 특단의 과학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 정책으로 경제가 바뀌고 연구 수준이 달라지는 시대는 지났다. 물론 정부 연구개발 투자는 계속 늘어야 하고 장기적인 혁신 정책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민간의 연구비 투자 규모가 정부 투자 규모의 3배 이상인 시대다. 소수의 한국 대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혁신적인 기업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혁신은 민간과 대학이 주도하는 것이고 정부 정책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기업이 변하고 대학이 변해야 한다.
굳이 정부 정책에 대해 말하자면 세 가지 조언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장기적인 지속성이다. 연구개발과 기초연구에 투자를 오래 지속해야 한다. 시스템 혁신도 계속 이뤄져야 한다. 두 번째, 균형 잡힌 정책이다. 세계에서 4차 산업혁명을 이렇게 많이 부르짖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인공지능(AI)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지도 않고 정부가 AI에 ‘올인’하거나 대학의 모든 학부생에게 AI를 가르친다거나 하는 균형 없는 정책을 해서는 안 된다. 셋째, 현재와 미래의 인력에 대한 보다 진정성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모든 혁신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혁신의 주체, 즉 높은 수준의 혁신 인재들이다. 지금과 같은 입시·중등교육과 획일화되고 구시대적인 대학교육을 통해 혁신 인재를 길러낼 수는 없다. 일본이 이미 걷고 있는 몰락의 길을 우리도 곧 걷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포스텍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