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레돔은 벌거벗은 땅에게 어서 빨리 초록의 풀 이불을 덮어주고 싶어 한다. 여기저기 포클레인에 파헤쳐진 땅을 둘러보며 다친 아이를 보듯 안타까워한다. 보슬거리는 흙더미를 볼 때면 다정한 손길로 만져보고 비벼본다. 돌들을 부숴 그 결을 보고 냄새를 맡아본다. 야트막하게 언덕진 이곳은 편암 돌들이 섞인 검은색 흙밭이다. 밭 한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차지하고 있고, 나무라고는 비틀거리는 자두나무 한 그루가 전부다. 앞으로 우리는 이 나무를 아주 끔찍하게 사랑해줄 작정이다. 포도밭 한가운데 선 아름다운 나무가 되도록 할 것이다.
비로소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지게 되자 레돔은 와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떼루아는 프랑스 말로 ‘땅’이란 뜻인데, 와인이 온 땅을 가리킬 때 흔히 쓰는 말이다. 한 잔의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한 움큼의 땅을 마시는 것과 같다. 와인 맛이 다른 것은 땅이 다르기 때문이고, 땅이 다른 것은 지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와인들마다 자란 땅의 출신에 따라 다른 맛을 낸다는 것은 신비롭다. 세상의 모든 와인이 같은 맛을 낸다면 세상은 참 지겨울 것이다. 각 지역마다 다른 땅이 있고, 당연히 지역마다 다른 술이 있고 다른 음식이 있고 다른 문화가 있다.
“그러니까 이 언덕에서 난 포도로 담근 와인은 수안보 중에서도 수회리, 수회리 중에서도 480번지 레돔의 집 떼루아가 될 수 있다는 거야. 이 빈 언덕이 어떤 모습의 포도밭이 될지, 어떤 맛의 포도가 나올지, 어떤 맛의 와인이 나올지 정말 궁금하네.”
빈 땅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와도 같다. 이제 이곳에 줄을 치고, 줄을 따라 골을 만들고, 골을 따라 나무를 심고, 그 끝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철사를 엮어 포도나무 줄기가 타고 올라 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언젠가 포도 열매가 열릴 것이고 그것으로 술을 담글 것이다. 미래의 포도나무를 꿈꾸는 동안은 좋았지만 현실로 돌아오니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며칠 사이 땅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땅을 부드럽게 일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농기계를 빌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농협에 가서 농업인 안전 보험도 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경영체 등록도 해야 한다.
“그런데 호밀이랑 보리씨앗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땅이 점점 더 굳어가잖아.” 빈 땅 앞에서도 저리 걱정이 많은데 나무를 심어놓고 나면 밤낮으로 또 얼마나 근심걱정이 많을까. 이윽고 보리와 호밀 씨앗이 도착하자 그는 한가득 탐스럽게 쥐어본다. 이 작은 씨앗들이 빈 땅을 푸르게 덮어 따뜻하게 하고 그 아래 미생물들이 풍성하게 살아, 내년 봄에 심겨질 나무뿌리들을 부드럽게 간지럽힐 것이다. 우리는 흙이라는 백지 위에 이렇게 써본다. 수안보 와인 떼루아, 이제 시작이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