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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경제보복 타격 ‘소·부·장’ 살리기 위해 과기원이 뛴다

입력 | 2019-10-18 03:00:00

KAIST-GIST-포스텍 등도 동참
소재부품 분야 기술자문단 꾸려 희망 기업에 맞춤형 조언 제공



KAIST 기술자문단은 9월 10일 충남 아산에 자리한 반도체 장비제조업체 A사를 방문해 현장을 둘러보고 맞춤형 조언을 제공했다. KAIST 제공


충남 아산에 있는 반도체장비 제조업체 A사는 지난해 레이저 빔을 이용해 반도체 모듈에 칩을 부착하는 장비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술은 일본 기술보다 생산효율이 10배 정도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미 관련 특허 수십 건을 등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회사가 아직 풀어야 할 기술적 과제가 남아 있다. 레이저 빔을 균일하게 만들고 원가를 낮추는 일이다. A사는 고민 끝에 최근 KAIST에 도움을 요청했다.

KAIST는 8월 초 일본 정부가 소재부품 수출 규제 발표가 있은 직후 국내 기업들이 봉착한 기술적 문제를 현장에서 듣고 풀어줄 기술자문단을 꾸렸다. 레이저 분야 권위자인 공홍진 KAIST 물리학과 교수가 나섰고 현재 레이저 빔 균일성 확보를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공 교수는 “6개월 정도면 기술적 문제를 포함한 원가 절감 방안이 나올 것”이라며 “기업도 의욕적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를 단행한 지 100일이 지났다. 한국 정부는 해외 의존도가 높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자동차, 전기전자, 기계금속, 화학 등 6대 분야에서 100여 개 핵심 품목을 선정하고 1∼5년 내 국산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2022년까지 신규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R&D)에 총 5조 원 규모의 R&D 예산을 투자하겠다고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학계도 발 빠르게 동참했다. 8월 5일 KAIST가 국내 기업의 소재·부품·장비 원천 기술 개발을 돕기 위해 전·현직 교수로 구성된 기술자문단을 꾸린 것을 시작으로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차례로 기술자문단을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포스텍 등 다른 대학도 각각 기술자문단을 꾸려 지역 기업 돕기에 나섰다. 기술자문을 희망하는 국내 기업이 전담접수처로 연락하면 관련 전문가들이 사전 심사를 거쳐 맞춤형 조언을 제공한다.

국내 기업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4일 현재 KAIST 기술자문단에 총 159건의 요청이 들어왔다. 품목도 포토레지스트와 반도체 공정장비, 저열팽창 불소화 투명 폴리이미드 등 일본 수출 규제에 따라 타격이 예상되는 품목이 많았다.

충북 음성의 또 다른 반도체소재 개발 업체 B사도 교수들과 협업에 나섰다. B사는 일본 수출 규제 핵심 품목 중 하나인 포토레지스트 개발을 고민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공정에서 표면 패턴을 그리는 데 쓰이는 광반응물질이다. B사는 평생 포토레지스트 연구에 매진해온 김진백 KAIST 명예교수를 콕 집어 기술자문을 요청했다. 김 교수는 요청을 받고 업체를 직접 방문해 포토레지스트와 관련된 기술을 살펴보고 도움을 줬다. 김 교수는 “B사는 지금까지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하지 않았지만 일본 수출 규제로 개발에 관심을 갖게 돼 기술자문 요청을 해 왔다”며 “기술자문 결과를 토대로 현재 포토레지스트 개발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최성율 KAIST 기술자문단장은 “소재나 반도체, 디스플레이, 장비 분야와 관련한 기술자문 요청이 특히 많이 들어왔다”며 “전문가가 조언을 해야 할 기술인지, 해당 기업이 기술자문을 통해 국산화를 이룰 만큼의 역량을 가졌는지를 사전 심사해 기술자문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KAIST는 159건의 기술자문 요청 가운데 24건에 대해 전문적 조언을 제공하고 있고 나머지 요청 건은 KAIST 산학협력단 기술사업화센터에서 맡거나 적절한 기술자문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연구기관으로 연결해주고 있다.

기술자문 요청이 KAIST에만 집중되고 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나머지 과기원이나 대학에 들어온 기술자문 요청은 아직 10건이 채 안 되고 아예 요청이 한 건도 없는 경우도 있다. 한 과기원 관계자는 “KAIST는 지명도도 있고 다른 과기원에 비해 학교 규모도 몇 배 크기 때문에 기술자문 요청이 몰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업들도 걱정은 있다. 기술자문을 받으려면 영업 비밀 내지는 취약점을 밝혀야 하는데 이런 내용이 외부로 알려질까 두려운 것이다. 자칫 경쟁력을 강화하려다 기업 비밀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충북 청주의 한 소재 제조 회사인 C사 관계자는 “기술자문단으로 활동하는 교수 중 경쟁사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교수가 있다는 점도 기술자문을 꺼리게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 단장은 “기업의 기술자문 요청 내용은 철저히 비공개로 한다”며 “국정감사에서 자료를 요구해도 익명 처리를 한다. 기업과 자문단이 서로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jawon121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