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손흥민 “北선수들, 공 상관없이 달려들어… 심한 욕설, 기억하기 싫을 정도”

입력 | 2019-10-18 03:00:00

[평양 남북축구 파문]선수들이 전한 평양 경기 상황
벤치 北선수들, 경기 내내 고함 질러… 공중볼 경합 파울 상황 北 거센 항의
北선수 황인범 얼굴 가격 일촉즉발… 2박3일 철저 고립… “푹 자서 좋았다”




‘평양 원정’을 마치고 17일 새벽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한 한국 축구대표팀 주장 손흥민이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남북전(15일)에 대한 소감을 밝히고 있다(왼쪽 사진). 파울루 벤투 한국 대표팀 감독은 “선수들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경기력에서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인천=AP 뉴시스

“악∼악∼.” “어이 어이∼.” “올려라.”

북한 선수들이 공을 잡으면 벤치에 있던 북한 선수들이 모두 일어나 손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날카롭고 높은 고함소리가 관중이 없어 텅 빈 경기장 벽에 메아리치면서 웅웅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울려 퍼진 이 소리들로 귀가 아플 정도였다.

17일 대한축구협회를 통해 언론에 공개된 한국과 북한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15일) 영상이다. 전후반 90분을 모두 담은 이 영상의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작심한 듯 육탄공세로 나온 북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양 팀이 2장씩 경고를 받은 가운데 북한의 거친 플레이를 주심이 자제시키느라 경기가 자주 중단됐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13위 북한은 한국(37위)보다 열세인 전력을 강한 몸싸움을 통한 신경전으로 극복하려 했다. 한국 에이스로 집중 견제를 당한 손흥민(27·토트넘)은 17일 귀국한 뒤 ‘거친 말이 있었나’라는 질문에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선수로서… 북한 선수들이 우리에게 심한 욕설을 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 작전이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반 6분 만에 양측 선수들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다. 공중 볼 경합을 하던 나상호가 북한 박명철에게 파울을 하자 북한 선수들이 항의했다. 이때 북한 선수가 한국 황인범의 얼굴을 쳤다. 이에 황인범이 심판에게 거세게 항의했고 이를 본 양측 선수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손흥민이 북한 선수들 가운데로 가 뜯어말리는 장면이 연출됐다. 북한의 리영철이 한국 정우영의 가슴을 세게 밀면서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수비수 김문환(24·부산)은 “북한은 공과 상관없이 사람을 보고 달려들었다. 북한 한광성(21·유벤투스)과 몸싸움을 하다 같이 넘어졌는데 일어나서 어깨를 밀치고 갔다. 형들이 ‘북한 애들이 우리를 흥분시키려고 그런다. 말려들지 마라’고 얘기해 감정을 절제했다”고 말했다.

손흥민이 나서 뜯어말려 한국 주장 손흥민(붉은색 원)이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북한과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서 양 팀 선수들이 대치하자 북한 선수들 사이로 들어가 싸움을 말리고 있다. 요아킴 베리스트룀 북한 주재 스웨덴대사 트위터

전반 30분에는 북한 리영직이 김문환을 상대로 깊은 백태클을 해 경고를 받았다. 레드카드(퇴장)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험악한 분위기와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거칠게 달려드는 북한식 축구는 한국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한국은 위축된 듯 전반을 유효슈팅 0-1로 뒤진 채로 마쳤다. 한국은 후반 24분 김문환의 슛이 북한 골키퍼 선방에 막혀 결정적 기회를 놓쳤다. 슈팅을 막기 위해 몸까지 던지는 북한의 수비 공세에 한국은 중앙과 측면 돌파 모두 부진했고 0-0으로 비겼다.

이날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 텅 빌 줄은 선수들도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손흥민은 “당황하기보다는 (북한이) 우리를 강팀으로 생각하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당초 이 경기는 손흥민과 북한 유망주 한광성의 골잡이 대결로도 관심을 모았다. 손흥민은 “한광성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고 했다. 경기 후 유니폼 교환이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굳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한국은 미국 브랜드 나이키의 유니폼을 입기 때문에 대한축구협회는 대북 제재 위반을 우려해 선수들의 유니폼 교환을 금지했다.

평양 순안공항에서의 장시간(2시간 30분)에 걸친 입국 수속 등 북한으로부터 ‘진 빼기’ 대우를 받은 선수들은 휴대전화 반입 금지, 곳곳에 배치된 북한군의 통제 등으로 2박 3일간 철저히 고립됐다. 하지만 선수들은 긍정적 생각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손흥민은 “잠을 많이 잘 수 있어 좋았다. 선수들끼리 전술에 대해 토론하고 재밌는 얘기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김문환은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대사관에 맡겨놨던 휴대전화를 돌려받고 전원을 켜니 수많은 메시지가 들어와 있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며 웃었다. 수비수 김민재(23·베이징 궈안)는 “북한에서 휴대전화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스태프가 준비한 자명종 시계 덕분에 제 시간에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수들은 내년 6월 4일 열리는 북한과의 2차 예선 안방경기에서 실력으로 상대를 완벽히 제압하겠다고 했다. 북한 선수에게 가격을 당했던 황인범은 “우리가 거칠었던 평양 원정에서 느낀 것이 무엇인지를 안방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이원홍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