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개월간 이어지는 즉위 의식
당초 일왕 내외는 22일 오후 3시 30분에 카퍼레이드인 ‘축하어열식’을 할 예정이었다. 도요타 세단 ‘센추리’를 개조한 오픈카를 타고 약 30분간 도심 4.6㎞를 도는 행사다. 1990년 그의 부친 아키히토 일왕은 영국 고급차 롤스로이스를 타고 같은 행사를 치렀다. 당시 약 12만 명의 시민이 현장에서 이를 지켜봤다. 하지만 ‘하기비스’로 인한 인명 피해가 워낙 커 태풍 피해가 어느 정도 수습된 다음 달 10일 이 행사를 치르기로 했다.
일왕은 다음 달 14, 15일 양일간 다이조사이(大嘗祭)라는 추수 감사 의식도 진행한다. 이 행사가 끝나야 즉위 관련 모든 행사가 끝난다. 4월 1일 ‘레이와’ 연호를 발표한 후 장장 7개월 반 동안에 걸친 행사가 마무리되는 셈이다.
일본 정부는 이번 즉위식 행사를 위해 190여 개국에 초청장을 보냈다. 요미우리신문은 “80개국 이상에서 국가 정상급 인사가 일본을 찾는다. 16개국의 국왕이 직접 참석한다”고 전했다. 일본을 제외하고 현재 군주제를 유지하는 국가는 27개국. 이 중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왕들이 도쿄에 모이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나루히토 일왕 내외는 23일 오후 각국 왕족을 초대한 다회(茶會)를 연다.
● 위헌 및 국비 지출 논란
유명 헌법학자인 요코다 고이치(橫田耕一) 규슈대 명예교수는 아사히신문에 “3종 신기나 다카마쿠라는 천황이 ‘신의 자손’이라는 설화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헌법 1조는 ‘천황의 지위는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이케 아키라(小池晃) 공산당 서기국장도 가세했다. 그는 9일 “일왕이 다카마쿠라에 올라 즉위를 표명하는 것은 국민 주권 및 정교 분리에 맞지 않는다. 공산당은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다이조사이 비용에 관한 논란도 뜨겁다. 일본 정부는 1990년 아키히토 일왕 즉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다이조사이 비용을 국비로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루히토 일왕의 동생이자 왕위 계승 순위 1위인 후미히토(文仁) 왕세제는 지난해 11월 “다이조사이는 종교 색채가 강한 행사라 국비로 지출하는 것이 적당한지 의문”이라며 “일왕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내정비(內廷費)로 처리되는 게 적당하다”고 했다. 왕실 인사조차 왕실 내부 행사로 치러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 아베 정권 홍보 노림수
아베 정권은 아예 22일 즉위식을 정권 홍보 행사로 치르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베 총리는 4월 1일 ‘레이와’ 연호를 발표한 이후부터 즉위식을 사실상 본인을 위한 행사로 만들어왔다.
아베 내각은 중국 고전을 인용했던 과거와 달리 최초로 일본 고전 시가집 만요슈를 근거로 ‘레이와(令和)’를 골랐다. 정권의 핵심 지지층인 보수세력은 줄곧 “연호에서 중국색을 빼자”고 주장해왔다. 특히 첫 글자 ‘영(令)’은 240개가 넘는 연호에 처음 등장한 단어였다. ‘영이 서다’는 말에서 보듯 명령, 규범 등을 의미한다. 와(和) 또한 일본 음식을 의미하는 와쇼쿠, 일본 소고기 와규에서 알 수 있듯 일본색이 강하다. 이에 야권은 “정부 명령에 화합하라는 뜻에서 레이와를 골랐느냐”며 새 연호의 군국주의 색채를 우려했다.
아베 총리는 5월 1일 레이와 시대가 개막했을 때도 이를 축하한다며 일본 전역에 사무라이 7명이 등장하는 수묵화풍의 홍보물을 선보였다. ‘신시대 개막’이란 이 홍보물의 주인공도 총리 본인이었다. 홍보물 중앙의 사무라이 밑에는 ‘제21대, 25대 자민당 총재 아베 신조’라는 다소 낯 뜨거운 문구까지 등장했다. 22일 아베 총리가 발표할 축사의 내용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어떤 식으로든 본인을 돋보이게 하고, 개헌을 통해 일본을 전쟁 가능한 나라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피력할 것으로 보인다.
● 연이은 대형 행사에 고조되는 비판
4월 연호 발표, 5월 ‘레이와’ 시대 개막, 6월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7월 참의원 선거, 9월 럭비 월드컵, 10월 즉위식, 내년 7월 도쿄 올림픽…. 일본은 올해와 내년 쉴 새 없이 대형행사를 치른다. 이유가 뭘까. 많은 지식인들은 첫째 목표는 정권 연장이며 궁극적 목표는 개헌이라고 보고 있다. 이미 7월 참의원 선거 때도 집권 자민당의 주요 간부들이 공공연히 “국제행사 덕분에 자민당에 표가 더 몰릴 것”이라고 언급했다.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씨는 마이니치신문에 “6월 금융청이 연금 고갈이 우려된다며 국민 1인당 2000만 엔(약 2억2000만 원)의 저축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당시 큰 파문이 일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를 논의하지 않는다”며 “아베 정권이 노리는 것은 내부 문제에 대한 망각”이라고 비판했다. 미우라 마리(三浦まり) 조치대 교수(법률학)도 “들뜬 분위기를 통해 국민이 냉정한 논의를 할 수 있는 판단력을 없애고 있다”고 가세했다.
작가 즈지타 마사노리(辻田眞佐憲)는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아베 정권이 반드시 개헌을 추진할 것”이라며 “국민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냉정하게 정권의 공과(功過)를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아베 총리가 내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전격적인 중의원 해산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조기 총선을 통해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한 후 이를 발판으로 개헌을 밀어붙이려 한다는 것이다.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의 모회사 ‘퍼스트리테일’의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회장은 최근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올림픽 등 국가 행사가 부채질하는 현재의 축제 분위기는 옛 로마 제국의 ‘빵과 서커스’를 연상시킨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로마가 콜로세움에서의 잔혹한 검투사 대결 등과 같은 오락(서커스)과 식량(빵)을 제공하며 내부 비판을 차단했듯 연이은 대형 행사가 일종의 ‘3S’ 행사 성격을 지녔다는 비판이다. 스포츠(Sports), 성(Sex), 스크린(Screen)의 머리글자를 딴 말로 독재 정권이 국민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야나이 회장은 “그렇게 생활하면 결국 빵도 없어지고 서커스를 즐길 비용도 사라진다”고 꼬집었다.
●일왕 즉위식의 역사
18일 요미우리신문 등에 따르면 무인들이 정권을 잡았던 막부 시대(1185~1868년)에는 일왕의 권위가 약해져 즉위식도 조용히 치러졌다. 1868년 메이지유신 후 일왕은 다시 명실상부한 최고권력자가 됐다. 메이지 정권은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일본 왕실도 서구 왕실처럼 화려한 즉위식을 열기를 원했다.
다카기 히로시(高木博志)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메이지 정권은 대영제국,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러시아 왕조 등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열강들의 왕위 계승 의식을 참고해 일왕 즉위식을 정비했다”고 설명했다. 국왕의 머리 위에 왕관을 얹어 왕위에 올랐음을 만방에 알린 서구의 대관식이 일왕 즉위식의 교과서였던 셈이다. 22일 나루히토(德仁) 일왕 즉위식에도 190여 개국에서 정상급 인사가 대거 참석한다.
1915년 다이쇼(大正) 일왕 즉위식부터 범죄자 사면이 이뤄졌다. 역시 러시아 차르가 대관식 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회를 베풀던 관례를 참고했다. 이번에도 무려 55만 명이 사면을 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왕의 지위는 크게 바뀌었다. 1946년 헌법을 통해 최고 권력자가 아닌 상징적 존재로만 자리매김했다. 패전 후 첫 즉위식은 1990년 나루히토 일왕의 부친인 아키히토(明仁) 전 일왕 때 열렸다. 160여 개국 대표가 참석했고 60개국 이상에서 정상급 인사가 일본을 찾았다. 26개국은 왕족을 보냈다.
아키히토 전 일왕은 왕실의 국제화에도 힘썼다. 그는 2012년 79세의 고령에 심장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2011년 10월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사망했을 때 1박 2일간 조문도 다녀왔다.
22일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은 과거에 비해선 다소 간소하게 치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마이니치신문은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해외 왕족의 공항 영접 및 배웅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공항 영접 및 배웅은 왕가의 남성 인사가 담당했다. 1990년 아키히토 전 일왕 즉위식 당시에는 성인 남성 왕족이 7명이나 있었다. 지금은 나루히토 일왕의 동생이자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후미히토 왕세제, 후미히토의 아들인 히사히토 왕자 단둘뿐이다. 남성 왕족의 수가 줄어 간소화가 불가피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도쿄=박형준·김범석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