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책의 향기]당대 부조리와 싸운 절대고수 등장… 대중은 열광했다

입력 | 2019-10-19 03:00:00

[그때 그 베스트셀러]
◇인간시장 1∼10권/김홍신 지음/전체 3357쪽·세트 11만8000원(각 1만1800원)·해냄




‘인간시장’은 소설은 물론이고 영화, 연극, 드라마로 만들어지며 1980년대를 대표하는 대중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인간시장-작은 악마 스물두 살의 자서전’(1983년)의 한 장면. 동아일보DB

강창래 작가

1980년대 분위기를 이해하려면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3S 정책’을 알아야 한다. 3S란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말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엔터테인먼트에 묶어 두려는 우민화 정책이다. 프로 스포츠가 모두 1980년대 초에(스포츠),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1980년에(스크린) 시작됐고, 포르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에로영화(섹스)도 많이 제작됐다.

출판계에도 그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 스며들었다. 김홍신의 ‘인간시장’은 1981년에 1권이 나왔고, 6개월마다 한 권씩 출간됐다. 주인공은 절대고수 장총찬이다(장총을 찬 사람임을 암시한다. 권총찬이 검열 때문에 장총찬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부패한 지배층을 악으로 규정하고 종횡무진 통쾌하게 쳐부순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당대의 부패한 지배층 거의 모두를 처벌했다. 그런 주인공에게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리하여 2년 만에 한국 출판 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밀리언셀러가 됐다.

나는 베스트셀러를 잘 읽지 않았지만, 궁금해서 봤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무협지였다. 배경만 당대 한국 사회였을 뿐이다. 주인공은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만 거의 모든 무술에 통달했다. 심지어 소매치기나 화투 기술까지도 그랬다.

이런 무협지 스타일의 ‘엔터테인먼트’는 1980년대가 끝날 때까지 죽 이어진다. 1986년에는 주요 단행본 출판사였던 고려원에서 ‘영웅문’이 출간됐고 800만 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무협지 언어를 사용해서 쓴 유하의 시, ‘무림일기’(시집은 1989년)가 화제가 됐고, 김영하의 첫 번째 소설집도 ‘무협 학생운동’(1992년)이었다. 1980년대 한국은 무협지 세계였던 것이다.

사실 무협지는 3S 정책의 목적에 상당 부분 봉사한다. 대리만족으로 끝나는 환각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책이기 때문에 영향력이 조금 다를 수는 있겠다. 당시 지배층의 반응도 그랬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인간시장’의 작가 김홍신은 협박 공갈에 시달렸고 가족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또 다른 반체제 성향의 무협지와 운명이 크게 달랐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은밀한 베스트셀러, ‘무림파천황’이 있었다. 이 책은 모두 압수돼 불태워졌고 작가 박영창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김홍신은 방송계로 진출해 MC가 됐고, 국회의원이 됐다.

당연히 각성제 같은 대하소설들도 쏟아져 나왔다. 황석영의 ‘장길산’(1974∼1984년), 조정래의 ‘태백산맥’(1983∼1989년), 김주영의 ‘객주’(1979∼1984년), 박경리의 ‘토지’(1980년 3부까지 출간)로 현대 한국문학의 고전들이다. 이 작품들 역시 베스트셀러였다. 현실적인 삶의 구체성에 뿌리박고 고뇌하며 변화를 추구하는 진지한 독자들도 충분히 많았던 것이다. 나는 각성제 같은 작품들이 더 재미있었다. 독서는 기회비용을 지불하는 과정이다. 환각제 같은 책을 읽으면 각성제 같은 책을 읽을 시간이 사라진다.

강창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