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 ‘금융노마드族’ 급증, 화폐 유통 속도 급감 ● 주식에서 돈 빼 저축은행에 파킹 … 현금 쥐고 아파트 ‘기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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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강남구에서 전세살이를 하는 박성호(46·가명) 씨는 아파트 청약 뉴스만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는 2017년부터 아파트값이 계속 오르자 이듬해 초 보유하고 있던 강서구 아파트를 팔았다. 손에 쥔 목돈은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어뒀다. 강남지역 아파트가 분양될 때 바로 청약에 나설 생각에서다.
저축은행 예금이 투자 대안?!
집을 팔 때만 해도 박씨는 주변으로부터 “잘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단지 내 역대 최고가 매도”라는 부동산공인중개사사무소 사장의 말에 어깨도 으쓱했다. 하지만 요즘은 “팔지 말걸…” 하는 후회가 든다. 그사이 강남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강남권 신규 아파트 분양에 당첨되기가 ‘넘사벽’이 됐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간을 두고 강남 재건축 아파트 신규 분양을 기다려볼까 싶지만, 분양가 상한제 도입으로 재건축 추진이 무기한 연기되는 추세라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그는 “무주택 기간 15년, 부양가족 6명 이상이 아니면 청약 당첨은 언감생심”이라며 “금리가 너무 낮아 집 판 돈을 굴릴 데도 마땅치 않은데 아파트 매입 기회는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2 여유자금을 주로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직장인 오진희(40·가명·여) 씨는 수익률을 확인할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올해 들어 코스피가 크게 하락하면서 주식형펀드와 상장지수펀드(ETF)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그는 “수익은커녕 원금 손실액만 두 달 치 급여에 육박한다”고 했다.
최근 벌어진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상품(DLF·DLS) 사태 때문에 오씨는 금융사가 “비교적 안전한 상품”이라고 권해도 선뜻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오씨가 대안으로 찾은 투자처는 저축은행 정기예금. 1년 정기예금 금리가 2% 초반대에 그치지만, 원금 손실 위험이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서다. 오씨는 “5000만 원까지 예금자보호가 되기 때문에 이자를 감안해 각 저축은행에 4800만 원씩 쪼개 맡겨놨다”고 말했다.
한은은 돈 풀겠다지만…
여기에 더해 미·중 무역갈등을 비롯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도 여전하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기준금리 인하에 앞서 10월 8일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경기 회복세를 지원하는 데 통화정책의 초점을 맞춘다는 정책 신호를 금융시장에 보냈다”며 한은이 ‘돈 풀기’에 나섰음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하지만 한은이 돈을 풀려 해도 돈이 시중에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해소되지 않으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전날인 10월 15일 ‘기준금리 인하의 거시적 실효성 점검’ 보고서를 통해 ‘기준금리 인하로 경기활성화 및 물가안정 목표가 달성되긴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 장기금리와 단기금리가 따로 움직이는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지속되는 데다, 세계경제의 불확실성과 정부의 부동산 규제 강화 때문에 금리 인하가 주식 등 금융이나 부동산 가치를 올리는 자산 효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금리인하가 자산 효과로 이어지지 않고 다른 요인들까지 겹쳐 부동산시장은 소위 강남 아파트만 오르는 등 양극화 현상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투자 행위 자체가 ‘리스크’
최고 연 2.1% 금리를 제공하는 JT저축은행의 파킹 통장 ‘JT 점프업 저축예금’(왼쪽)과 최근 출시된 저축은행 통합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SB톡톡 플러스’. [저축은행중앙회]
저축은행에도 현금이 몰려들고 있다.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저축은행 수신액이 2011년 저축은행 부실 사태 이후 처음으로 60조 원을 돌파했다. 현재 영업 중인 72개 저축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평균 금리는 연 2.41%로 시중은행 대비 1%p가량 높은 수준이다. 이 정도 수익에도 만족하는 투자자가 늘고 있는 것이다.
갈 길 잃은 현금을 끌어들이고자 저축은행들은 잠깐 맡기더라도 높은 이자를 주는 ‘파킹 통장’을 연달아 출시하고 있다. JT저축은행이 9월 내놓은 ‘JT 점프업 저축예금’은 매분기 평균 잔액 기준으로 최고 연 2.1% 금리를 제공하는데, 출시 한 달 만에 누적 잔액 200억 원을 달성했다. JT저축은행 관계자는 “예상보다 반응이 좋은 편”이라며 “저축은행 통합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인 ‘SB톡톡 플러스’ 출시 이후 저축은행의 금융상품도 비대면 가입이 가능해져 조금이라도 높은 이자를 찾아 은행을 갈아타는 ‘금융 노마드족’을 끌어들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반면 금융투자 상품에서는 돈이 빠져나가는 추세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6월에서 9월까지 3개월간 국내 주식형펀드에서 1조120억 원, 해외 주식형펀드에서 1조1770억 원, MMF에서 1조3190억 원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금융투자협회는 “실물형 펀드를 제외한 증권, 단기금융, 파생형 펀드에서 자금이 유출돼 9월 전체 펀드 순자산은 전월 대비 2조5000억 원 감소했고, 전체 펀드 설정액은 전월 대비 4조 원 감소했다”고 밝혔다. 투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은 향후 경제상황을 비관적으로 보는 투자자가 많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장기적인 경기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는 투자 행위 자체가 리스크가 되기 때문에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양기인 신한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은 “미·중 무역갈등으로 코스피가 예측 불가한 영역이 됐다”며 “1단계 스몰딜에 이어 미·중 무역협상의 2단계 합의가 원만하게 추진된다 해도 연말 코스피는 100~200포인트 반등한 2200~2300선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남 아파트도 디플레 못 이겨
서울 강남구 삼성동 ‘래미안라클래시’ 본보기집을 찾은 예비 청약자들. 9월 진행된 이 아파트 단지의 평균 청약 경쟁률은 115 대 1을 기록했다. [뉴스1]
실제 강남 신축 아파트의 일반 분양 청약 경쟁률은 고공 행진하고 있다. 최근 일반 분양을 마친 삼성동 래미안라클래시(상아2차 재건축)와 역삼동 역삼센트럴아이파크(개나리4차 재건축)는 각각 115 대 1, 65 대 1의 평균 경쟁률을 기록했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실제 당첨되는 청약가점도 크게 올랐다. 래미안라클래시의 당첨 청약가점은 평균 68.9점, 역삼센트럴아이파크의 최저 가점은 69점으로 나타났다. 청약가점 만점은 84점으로, 무주택기간 15년 이상(32점), 부양가족 6명 이상(35점), 청약통장 가입 기간 15년 이상(17점)이어야 쌓을 수 있는 점수다.
이들 아파트는 분양가가 9억 원이 넘어 대출을 받을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이제 강남 아파트를 분양 받으려면 ‘집 없는 현금 부자’여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박상언 유엔알컨설팅 대표는 최근 청약 과열에 대해 “2000년대 초반 동시 분양을 하던 시절에나 나왔던 경쟁률”이라며 “분양가가 시세보다 낮게 책정되고,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 도입으로 강남에서 신규 아파트가 귀해질 것이라는 전망만으로는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저금리와 경기 둔화로 투자처를 잃은 현금 부자들이 강남 부동산으로 쏠리는 현상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돈맥경화 시대에 현명한 투자 전략은 무엇일까. 국내 증권사들은 주로 채권, 고배당·우선주, 국내외 리츠 및 인프라 등 부동산 관련 상품에 투자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는 인컴펀드를 추천한다. 실제 주식형펀드에서 자금이 빠져나간 것과 반대로 올해 들어 인컴펀드에는 1조5000억 원의 자금이 순유입됐다. 정부 지원책에 힘입어 롯데리츠를 시작으로 앞으로 공모리츠가 더 자주 등장할 것으로도 보인다. 정부가 내놓은 공모리츠 활성화 정책에는 배당소득세 분리 과세, 공모리츠 재산세 분리 과세 등 세제 혜택이 포함돼 있다.
김학균 센터장은 “금리가 낮다는 것은 돈에 대한 수요가 적다는 것”이라며 “무엇보다 기대수익률을 낮추고, 장기간 돈이 묶이는 투자는 하지 않아야 한다. 중국 주식에 꾸준하게 적립식 투자를 하다 크게 오르는 시점에 청산하는 전략도 괜찮다”고 조언했다. 양기인 센터장은 “자산의 40%는 현금 혹은 MMF로 유지하고, 40%는 국내·선진국·신흥국 채권에 골고루 투자하며, 나머지 20%는 미국·중국 주식을 구매하라”고 추천했다. 그는 “글로벌 부동산 경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미지수라 그간 수익률이 좋았던 해외 부동산 투자는 지금부터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상언 대표는 “낮은 금리가 부동산 투자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들 하지만, 아무리 강남 아파트라 해도 디플레이션을 이길 수는 없다”며 “장기 불황으로 무너졌던 일본 부동산시장의 선례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10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