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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악마도 디테일에 있다[오늘과 내일/하임숙]

입력 | 2019-10-21 03:00:00

기업 홍보대사까지 자처하는 대통령… 악마처럼 발목 잡는 법 제도 고쳐야




하임숙 산업1부장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내기도 하고 반도체 라인이나 디스플레이에서 대규모 투자도 한다. 항상 삼성이 우리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 주셔서 아주 감사드린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 것 같지 않은가. 이달 10일 방문했던 충남 아산시 삼성디스플레이 탕정사업장에서 한 말 같지만, 아니다. 2017년 7월 28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대기업 총수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대신해 나온 권오현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한 말이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요즘 대통령은 이런저런 산업 현장을 찾아 비슷한 발언을 하고 있다. 경제계는 착잡하다. 취임 이후 대통령은 기업인을 만날 때마다 ‘기업이 경제성장의 근간이다. 법과 제도로 뒷받침하겠다’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냈지만 이후 현실에서 이뤄진 정책 방향은 정반대로 갔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10일 삼성이 디스플레이 분야에 13조1000억 원을 투자한다는 발표를 한 탕정사업장에서 “우리 삼성이 경제를 이끌어줘 늘 감사하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디스플레이 강국으로 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 했다. 15일 경기 화성시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열린 ‘미래차 산업 국가비전 선포식’에서는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을 만나 “내가 요즘 현대차, 특히 수소차 홍보대사”라며 “(현대차의 성과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박수를 보낸다”고 했다.

대통령이 ‘현대차의 홍보대사’라 한 미래차 선포식 다음 날은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 입법 예고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은 경제계가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 국민연금이나 엘리엇 같은 기관투자가가 기업의 경영권에 지금보다 훨씬 쉽게 간섭할 수 있도록 ‘5% 룰’을 완화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구조는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엘리엇 같은 글로벌 헤지펀드는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투자한 기업의 본질적 가치 훼손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게 여러 사례로 증명돼 있다. 어떤 기업의 경영권이든 위협할 수 있는 이 규정이 규제개혁위, 법제처 심사를 거치면 바로 시행되게 돼 있다. 국회에서 여야 논의를 거쳐 법률을 개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기업에 하는 말은 그저 ‘립 서비스’가 아닌지 경제계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번 정기국회에 올라와 있는 집단소송법, 상생법, 유통산업발전법도 대기업의 발목을 잡을 대표 법들이다.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라 주말에 월 2회 문을 닫고 있는 대형마트들은 온라인몰에 떠밀려 이미 적자 성장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법 개정안에는 스타필드 같은 복합 쇼핑몰에도 같은 규제를 실시하자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미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돼 있는 주 52시간 근로제, 최저임금제를 보완해서 실시하자는 제안은 너무 오래 무시돼 이제는 ‘죽은 구호’ 같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오래된 말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도 사소한 부분까지 최고의 품격을 지니지 않으면 명작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독일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가 말해 유명해졌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제조 강국”이라는 아름다운 말도 실제 법과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현되지 않는다. 더구나 법과 제도가 제조업의 발목을 잡을 때 그건 신이 아니라 악마가 된다. 기업인들은 그래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더 현실감 있게 받아들인다.

한 전직 대기업 최고경영자는 이렇게 말했다. “신도 악마도 다 필요 없어요. ‘검찰과 장관이 각자 일을 하자’는 대통령 말씀대로 기업도 회사를 성장시키는 본연의 일만 하도록 내버려 두면 좋겠어요.”

하임숙 산업1부장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