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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결혼식장[2030 세상/정성은]

입력 | 2019-10-22 03:00:00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올해만 해도 결혼식을 몇 번이나 갔는지 모른다. 페미니즘 열풍으로 ‘비혼(非婚)’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젠더 갈등으로 탈연애를 선언하는 이들이 많지만 여전히 주말 예식장은 예약으로 가득 차 있다. 축의금을 가슴에 품고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오늘도 출동이다.

헐레벌떡 택시에서 내려 식장으로 달려가는데 어라, 신부대기실에 아무도 없다. 설마 아직 도착 안 했나? 나가 보니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입구에서 분주히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대박! 신부대기실을 없앤 거야?” “이렇게 신나는 날 어떻게 가만히 앉아만 있니? 보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신부는 이날을 위해 드레스도 활동성 있게 골랐다고 했다. 신랑 신부가 함께 포즈를 취하니 사진 찍는 분위기도 신이 난다.

그리고 시작된 결혼식. 사회는 신부의 오래된 친구가 맡았다.

한때 검색창에 ‘결혼식 사회 여자가 해도 되나요?’라고 검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올해 처음으로 친구 결혼식 사회를 봤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동네에서 말 좀 한다는 여자들이 주말마다 사회를 보러 다니더라. 세상이 변하는 속도만큼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마해, 박나래 같은 친구가 되어야지 다짐하던 차, 눈앞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오늘은 신랑 신부 두 사람의 날이기도 하지만, 이들을 낳고 길러 주신 부모님에게도 의미 있는 날입니다. 따라서 신랑 신부의 행복한 출발을 부모님과 함께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집안이 통째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랑∼ 입장!” 외치자 신랑이 수줍게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등장했고, “신부∼ 입장!” 외치자 신부가 부모님과 팔짱을 끼고 흥겹게 입장했다. 끝나고 신부에게 이 귀여운 아이디어는 어디서 보고 한 거냐 물어보니 스스로 생각했다고.

“아빠가 애인에게 나를 건네주는 퍼포먼스는 정말이지 하기 싫었어. 키워준 부모님을 떠나 우리 둘만의 길을 가겠다는 나름의 의지를 표현한 것도 있었고.”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면서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연출을 고안해 낸 친구가 대견하면서도, 뒷문장에 담긴 의미를 다 알 순 없었다. 결혼은 원래 부모에게서 독립해 둘만의 길을 가는 게 아닌가? 집에 와 친구가 꾹꾹 눌러쓴 청첩장을 다시 보며 그 어려움을 짐작할 뿐이다.

“각자가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함께 길을 내고, 곁을 지키며 두 사람의 여정을 이어가려 합니다. 사랑의 유효기간을 약속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약속하기보다 현재를 살며, 최선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좋고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시작했지만, 결혼 준비를 하면 할수록 결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고 큰 결정인지에 관해 가슴 졸여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인생 최고로 아름다운 날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오랜 시간 듣다 보면, 혹시 그날 이후로 펼쳐질 내 삶은 그보다 아름다울 순 없는지 무서워지기 마련이다.

그 무서움을 이기려 서로의 결혼식에 달려가 편지를 읽어 주고, 노래를 불러 주고, 박수를 쳐주는 날들이다. 결혼이 제약이 아닌 삶을 꿈꾼다. 서로가 가장 연약한 순간에도, 행복한 순간에도 함께했음을 잊지 말자.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