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서울 용산 일대의 방직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일하는 모습(왼쪽 사진). 목화에서 얻은 솜으로 실을 짜면 옷감을 만들 수 있다. 사진 출처 뉴스1·Freepik
○ 인도에서 고려까지, 목화의 유래
목화는 주로 아열대나 온대 지방에서 자랍니다. 1년생이 대부분이지만 더러는 나무처럼 해를 넘겨 자라기도 합니다. 목화씨를 심으면 하얀 솜을 얻을 수 있고 그 솜으로 실을 만든 후 짜서 옷감을 생산합니다. 실을 만드는 일을 방적(紡績), 실을 짜서 옷감을 만드는 것을 방직(紡織)이라고 부릅니다.
이 하얀 옷감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촉감이 좋습니다. 여름에는 땀을 잘 흡수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사계절 모두 입을 수 있습니다. 흰색이어서 쉽게 염색해 입을 수 있습니다. 목화솜이나 면직물은 옷감뿐만 아니라 이불, 갑옷, 선박의 돛, 화승총의 재료 등으로도 쓰입니다.
○ 옷감을 돈 대신 사용했다?!
면직물은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점차 화폐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사람들은 옷감을 시장에 가지고 가서 다른 물건과 교환했습니다. 정부는 많은 분량의 세금을 면직물로 받기도 했습니다. 군역으로 납부하는 군포(軍布) 역시 면직물 등의 옷감이었습니다. 여성들은 집에서 면직물 혹은 모시, 삼베 등의 옷감을 만들어 세금으로 냈습니다. 또한 면직물은 여진과 일본 등에 수출됐습니다. 조선 중종 시기 일본에 수출된 면직물은 5만∼10만 필이었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더 많은 면직물을 사가려고 했고 조선은 수출량을 제한하려 하면서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도 생산량에 큰 변화 없이 면직물 생산이 지속됐지만 그 질은 점차 떨어졌습니다. 세금 납부를 위해 생산하는 면직물은 좋은 품질로 만들기보다는 양을 채우기에 급급한 측면도 있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상인들은 영국에서 생산한 면직물을 조선 시장에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영국산 면직물이 시장에 대량으로 풀리면서 우리나라 면직물 산업은 위기를 맞게 됐습니다.
○ 산업 발전의 단초가 된 면직물
유럽은 전통적으로 염소 가죽이나 양털 같은 모직물을 사용해 옷을 지었습니다. 중세 농노들은 옷이 귀해서 부모가 입던 옷을 서로 상속받고 싶어 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려면 따뜻한 외투가 필요한데 그 옷을 구하기가 어렵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외투’는 주인공이 새로 장만한 외투를 노상강도에게 빼앗기고 절망한 나머지 죽는 내용입니다. 19세기 러시아의 하급관리조차 외투를 평생에 한 벌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현대인이 집을 장만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유럽에 인도산 면직물이 전해졌습니다. 1492년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에 생겨난 동인도회사들이 인도산 면직물을 구매했죠. 당연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면직물 수입이 늘면서 기존의 모직물 산업이 위기에 처하자 영국은 목화솜을 수입해서 직접 면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면직물 생산 방식은 곧 세계로 전파됩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부터 직접 기계화된 방식으로 면직물을 생산했습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 목화를 재배해 면직물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아시아는 건조 지역이라 아랄해에서 물을 대규모로 끌어다가 농사를 지었는데 이 때문에 아랄해가 점점 사라져 가는 불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일제강점기에 인촌 김성수 선생은 지금의 서울 영등포 지역에서 ‘경성방직’을 창업했습니다. 이후 많은 중소기업이 설립돼 흔히 말하는 ‘메리야스’를 생산했죠. 1950년대 후반에는 미국이 원조한 목화솜을 이용해 면직물을 대량 생산했고 이를 기반으로 섬유산업이 발전하게 됐습니다.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이 이 시기에 터를 닦아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농촌의 젊은이, 특히 여성들이 도시로 와 공장에서 면직물을 생산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전태일 열사도 방직공장 노동자였습니다.
목화 재배와 면직물 생산 과정을 잘 이해하셨나요? 옷감 한 가지를 가지고도 배울 수 있는 점이 참 많습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 옷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있는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