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범죄 증거물 관리 엉망… ‘항온-항습시설 보관’ 규정 안지켜 국감 앞두고 지적 받고서야 옮겨… 범행 흉기 사무실 계단에 두기도
“유류품(증거물)을 재감정해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
지난달 20일 대구 달서구 와룡산을 찾은 민갑룡 경찰청장은 “사건을 재수사해 꼭 범인을 잡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와룡산은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피해자들의 유골이 발견된 장소로 이날 유족들도 이곳을 찾았다. 민 청장의 이 같은 다짐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의 유류품에서 최근 검출한 유전자(DNA)로 용의자를 밝혀낸 것처럼 ‘개구리소년 실종사건’도 증거물 재감정으로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는 작업에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5명의 ‘개구리소년’은 1991년 3월 대구의 집을 나선 뒤 실종됐고 11년 만인 2002년 9월 유골로 발견됐다.
그런데 민 청장이 와룡산을 찾은 시간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의 증거물은 대구지방경찰청 증거물보관실에 사실상 방치돼 있었다. 보관실엔 실내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줄 항온·항습기가 없었다. 증거물을 보관할 냉장고도 없었다. 경찰청의 ‘통합 증거물 관리지침’은 지문이나 DNA 등이 남아있을 수 있는 증거물을 항온·항습 시설이 있는 곳에 보관하도록 했다. 경찰이 미제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증거물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경찰청 등에 따르면 대구경찰청은 이달 4일에야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증거물을 항온·항습기가 갖춰진 대구 수성경찰서로 옮겼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바른미래당 권은희 의원실로부터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증거물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느냐’는 문의를 받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올해 8월 경찰은 증거물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면서 경찰서마다 전담 직원을 두고 매일 보관실 설비 등을 관리하도록 했다. 하지만 일선 경찰들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고 얘기한다. 서울의 한 경찰서 증거물 보관실 담당 직원은 “매일은 못 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관리실을 점검하고 있다”며 “누락된 증거물이 없는지 수사팀에서 전산시스템에 입력한 증거물과 보관실 내 증거물 개수를 맞춰보는 정도”라고 했다. 대구지방경찰청의 증거물 관리 담당자도 “증거물을 어떻게 보관할지는 수사팀이 알아서 판단할 부분”이라며 “증거물 관리자가 하는 일은 입고된 증거물 수를 파악하는 수준이다”고 말했다.
임시근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지금 우리나라 경찰은 증거물을 제대로 관리하라고 권고하는 정도”라며 “미국이나 영국처럼 증거물 수집과 감정, 보관 절차를 법으로 명확히 정해 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은희 의원은 "경찰의 개선된 통합증거물 관리시스템 역시 미흡한 점이 많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며 "경찰은 이번 일을 계기로 증거물 관리 절차를 체계적으로 개선해 수사의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고도예 기자 y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