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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런 저니… 새는 날고 사람은 달린다[광화문에서/이헌재]

입력 | 2019-10-24 03:00:00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20일 경주행 새벽 첫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몸은 천근만근, 눈꺼풀은 무거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요일 아침의 늦잠을 포기하고 마라톤을 위해 경주행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옅은 잠에서 깨어 신경주역에 내리니 ‘비정상’인 사람들이 한가득했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파란색 마라톤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대회는 축제였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가득한 경주 도심을 가로지르며 달리기를 즐겼다. 첨성대를 바로 옆에서 지났고, 핑크뮬리를 눈에 담았다. 풀코스부터 하프코스, 10km, 5km 건강달리기 가운데 기자는 10km를 선택했다.

원래부터 달리기에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달리기는 지루한 운동이라 생각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달리기가 재미있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올해 3월 취재를 겸해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달리는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10km를 뛰었다. 힘도 들고, 무릎도 아팠다. 하지만 완주에는 소소한 기쁨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상(償)이란 것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지만 완주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빨간색 메달을 받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응원과 박수를 보냈다.

지난달에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공주에나 가보자는 기분으로 공주백제마라톤에 참가해 10km를 뛰었다. 공주와 어울리는 초록색이 대회의 상징 색이었고, 완주 기념으로 초록색 메달을 받았다.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멈췄을 것이다. 그런데 경주국제마라톤에는 파란색 메달과 함께 또 하나의 선물이 걸려 있었다. 서울, 공주, 경주를 모두 완주한 러너에게만 수여되는 ‘런 저니(Run Journey) 스페셜 메달’이었다. 세 도시의 특징과 함께 세 대회를 상징하는 빨강, 초록, 파랑을 모두 담은 특별한 메달이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달리기와 수집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400여 명이 세 대회를 차례로 완주하며 ‘런 저니’를 완성했다.

세 대회 모두 20, 30대 젊은이들이 많은 게 특징이었다. 예전의 마라톤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극한의 스포츠였다면 요즘은 ‘펀 런(Fun Run)’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무리하지 않고 달리기 자체를 즐겼다.

개인적으로는 마라톤 때마다 겸손을 배우게 된다. 10km를 뛰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찬데 주변에는 하프코스나 풀코스를 뛰는 사람이 많다. 같은 10km라 하더라도 앞서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경주국제마라톤에서는 6km가량 지났을 때 바로 옆에서 통산 500번째 풀코스 완주에 도전한다는 박춘자 씨(47)와 마주쳤다. 또 한 명의 강호의 고수를 만나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마라톤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박 씨의 대기록을 축하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장거리 육상 선수 출신으로 ‘인간 기관차’로 불렸던 에밀 자토페크의 명언이 새겨진 플래카드를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는 날고 사람은 달린다.’

인생은 달리기고, 달리는 게 인생이다. 내년엔 새해의 런 저니가 다시 시작된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