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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혼인중 태어난 자녀, 아버지와 유전자 달라도 親子”

입력 | 2019-10-24 03:00:00

전원합의체 ‘친생자 추정 원칙’ 재확인




아내가 남편의 동의를 얻어 다른 사람의 정자로 인공수정을 해 아이를 낳았다면 이 아이의 친아버지는 누구일까. 친자식으로 알고 키우다 유전자 검사 결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면 부자 관계가 성립할까. 둘 다 법적으로 친생자(親生子)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만 친생자 추정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36년 전 판례를 유지한 것이다.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A 씨가 자녀 2명을 상대로 “친생자 관계가 아니다”라며 낸 친생자관계부존재 확인소송 상고심에서 “유전자 검사에서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이 밝혀졌더라도 친자식으로 추정된다”며 원고 패소(각하)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A 씨 부부는 A 씨의 무정자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자 제3자에게 정자를 제공받아 1993년 첫째 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4년 뒤 둘째 아이를 낳게 되자 A 씨는 무정자증이 치유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A 씨는 뒤늦게 둘째 아이가 아내의 혼외 관계로 생긴 사실을 알았고 2013년 부인과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두 아이 모두 친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기존 판례에 따라 두 자녀 모두 “친생자 추정 예외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친생관계부존재 확인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198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부부가 동거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 명백한 외관상 사정이 존재한 경우에만 친생자 추정이 깨질 수 있다’며 친생자 추정의 예외를 좁게 인정했다.

2심은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첫째 아이는 A 씨가 동의했기 때문에 친생자로 추정했다. 반면 둘째 아이의 경우는 친생자 추정의 예외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10여 년 동안 직접 양육해 양친자 관계가 인정된다며 소를 각하했다.

대법원은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넘겨 올해 5월 공개변론을 하는 등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쳤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혈연관계 입증이 쉬워진 만큼 36년 전 판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23일 김명수 대법원장 등 9명의 다수의견은 “친생자추정원칙(민법 844조)은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를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고만 정하고 있을 뿐”이라며 “혈연관계의 존부를 기준으로 그 적용 여부를 달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36년 전 판결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법조계에선 과거 판례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판례를 유지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수의견은 특히 ‘가족관계’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다수의견은 “인공수정 자녀의 신분 관계 역시 다른 친생자와 마찬가지로 조속히 확정되게 친자 관계 및 가족 관계의 법적 안정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A 씨가 둘째 아이와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중에 확인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생자 추정의 예외 사유로 볼 수 없다며 “혈연관계 없이 형성된 가족 관계도 헌법과 민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족 관계에 해당한다”고 했다.

권순일 노정희 김상환 대법관은 별개의견을 통해 “남편과 혈연관계가 없고 사회적 친자 관계가 없거나 파탄된 경우에는 친생자 추정 예외가 인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민유숙 대법관은 반대의견으로 “가족제도를 둘러싼 분쟁 현실과 제도 변화에 비춰 함께 살지 않는다는 이유 외에도 명백한 다른 사정이 있으면 친생추정 예외가 인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유전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친생자 추정의 예외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뿐이지 친생자가 아니라는 소송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건 아니다. 친생자로 추정되는 경우에도 민법(847조)에 따라 친자가 아님을 안 날로부터 2년 안에 ‘친생부인(否認)의 소’(친생자 추정을 번복하는 소송)를 제기할 수 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