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23일 이른 아침에 전해져 온 북한 발(發) 뉴스 말입니다.
군더더기 다 덜어내고 골자만 정리해 보면 이겁니다.
1. 한국이 금강산에 지은 각종 시설물 다 철거해라.
2. 금강산은 남북의 공유물이 아니고, 남북관계의 상징물은 더더욱 아니다.
3. 한국을 내세워 금강산 관광사업을 하지 않겠다.
우리 정부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국회 시정연설(22일) 다음날 북한의 발표가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금강산 관광은 북한의 핵개발 등 안보상황의 변화에 따라 잦은 부침을 겪다가 2008년 7월 박왕자 씨가 총격을 받아 사망하면서 현재까지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 파란만장했던 금강산 사업이 이제 완전히 종언(終焉)을 고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왼쪽에서 두 번째)등 현대 방북단이 1998년 10월 30일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한 뒤 기념 촬영한 사진이 실린 노동신문 1면.
● ‘경애하는 지도자’를 부정하다
이제부터는 북한 방송이 전한 김정은 위원장 발언의 ‘디테일’을 짚어 보겠습니다.
“손쉽게 관광지나 내어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이다.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 정책이 매우 잘못되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부정한 듯한 태도입니다. 백두혈통을 사실상 유일한 권력 정통성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김정은이 ‘경애하는 지도자(Dear Leader)’인 아버지를 ‘선임자’로 지칭하며 ‘남(南)에 의존하려 했다’고 규정한 것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유훈(遺訓) 통치 체제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의 표출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저돌적 돌직구 날린 ‘젊은 독재자’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시설들을 남측의 관계부문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록 하고 금강산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봉사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하여야 한다.”
한국이 지어준 건물에 대해 “민족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했고, “피해지역의 가설막이나 격리병동” 같다며 건축미학적으로 심히 낙후했다고 힐난했습니다.
강한 분노가 그대로 느껴지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같은 인식 속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새로운 금강산 개발사업에서 한국의 참여를 완전 배제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한 것입니다.
● 김 위원장 남북합의 정면위반
그렇다면 김 위원장의 이같은 판단과 생각은 정당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김 위원장의 이날 발언은 남북간의 합의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입니다.
지난해 평양정상회담의 결과로 내놓은 9·19 평양공동선언 2조 2항은 ‘남과 북은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과연 북한은 평양공동선언을 헌신짝 버리듯 하기 전에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다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정상화 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북한의 핵 문제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합니다. 북한이 신속히 비핵화를 향한 진정성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미국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인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가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금강산으로 이른바 ‘벌크 캐시(대규모 현금)’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국과의 경협을 거부하고 독자 사업을 펼치건, 중국을 등에 업고 새로운 사업에 나서건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두 차례의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지난해 4월 판문점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채택한 뒤 손을 맞잡은 두 정상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지난해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직후 공동선언을 발표한 뒤 악수하고 있는 모습.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김정은 위원장의 금강산 현지지도 소식은 북한 관영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됐고, 현대아산이 지어준 시설을 깡그리 허물어 버리라는 명령도 이미 전달돼 버린 것을…. 김 위원장이 “남측 관계부문과 합의하여” 철거작업을 벌이라고 한 대목에 주목해 남북대화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김 위원장은 이미 금강산은 북한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금강산에 있는 한국의 재산을 압류했을 때도, 자산을 몰수했을 때도 우리 정부가 실효성 있는 대응책을 낸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애꿎은 현대아산은 그동안 투자한 7865억원을 통째로 날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시설물에 투자한 금액이 2268억원이고 북한에 지불한 사업권 대가가 5597억원입니다. (조선일보 10월 24일자 2면 기사 인용)
16년 전 대북송금 수사과정에서 남편(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을 잃었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그에게 과연 북한, 그리고 ‘김씨 일가’는 어떤 존재일까요?
금강산 관광지도. 자료 비트맵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 부장급(정치학 박사 수료)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