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현의 워치앤톡(Watch&Talk)]
파네라이의 대표 컬렉션인 ‘라디오미르’. 파네라이는 자체 개발한 발광물질 ‘라디오미르’를 컬렉션 이름에 그대로 붙였다.
디자인을 대충 살피고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이불을 뒤집어쓰는 일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주한 흐릿한 시계 화면이 이유 없이 멋져보였다. 화면 한쪽에 옅은 불빛이 들어오는 야광 기능이 없는 제품이었지만 잠들기 전 꼭 몇 번씩 버튼을 눌러 불을 밝혔다. 야광 기능이 있는 시계를 갖게 된 후에는 더욱 여러 번 이불을 뒤집어썼다. 낮에는 숨었다가 오직 어둠 속에서만 존재를 드러내는 야광은 밤하늘 별처럼 신비로웠다.
두 개의 얼굴
시계가 빛을 내는 방식은 크게 ‘축광식 루미노바(Luminova)’와 ‘트리튬(Tritium)’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건 축광 방식의 루미노바로 어둠에 놓이기 전 일정 시간 동안 빛에 노출돼야만 빛을 뿜을 수 있다. 처음에는 아주 강한 빛을 내뿜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밝기가 줄어든다. 요즘 출시되는 하이엔드 브랜드 제품에는 밝기와 지속시간이 일반 루미노바보다 훨씬 뛰어난 ‘슈퍼 루미노바’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라듐의 대체재로 등장한 방사선 소재 트리튬은 축광식 루미노바와 달리 서서히 빛을 낸다. 처음에는 발광을 하지 않다가 시나브로 빛을 뿜기 시작한다. 초기 밝기는 루미노바에 비해 떨어지지만 따로 빛을 모을 필요가 없고, 지속성이 길다는 특징이 있다.
야광 기술이 뛰어난 시계 브랜드는 군사용이나 다이버워치로 유명한 경우가 많다. 전투나 심해(深海) 잠수 등 특수 상황에선 빛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낮의 얼굴만큼이나 밤의 얼굴이 잘 알려진 이탈리아 브랜드 ‘오피치네 파네라이’는 원래 ‘군인을 위한 시계’였다. 이탈리아 왕실 소속 해군에 야간 작전용 시계를 공급했던 파네라이는 20세기 초 라듐을 기반으로 한 발광 물질 ‘라디오미르(Radiomir)’를 발명해 특허를 출원했다. 파네라이가 군에 시계를 공급하던 1930년 당시, 적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진흙이나 해초로 시계 불빛을 가려야 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파네라이의 야광 기술은 독보적이었다. 현재 파네라이의 대표 컬렉션 이름이 ‘라디오미르’인 것을 보면 야광 기술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다이버워치 연구 개발에 큰 공을 들이고 있는 롤렉스는 주요 제품에 자체 야광 기술인 크로마라이트 기술을 적용했다. 크로마라이트 야광 물질은 초미세 금속 산화물을 활용한 특수 물질로 8시간 이상 밝은 빛을 낸다.
롤렉스의 크로마라이트 디스플레이.
빛 속에 감춰진 어둠
문제는 제작 방식이었다. 붓으로 야광도료를 숫자판(인덱스)에 발랐는데 좀 더 정교한 칠을 위해 작업자들은 항상 라듐이 묻은 붓 끝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대부분 여성들로 하루 250개의 숫자판을 칠해야 했던 일명 ‘라듐걸스’는 이후 이가 빠지고 심각한 빈혈에 시달렸다. 붓 끝에 묻어 있던 라듐이 입을 통해 골수로 침투해 빈혈과 백혈병을 일으킨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라듐을 삼켜야 했던 여공들의 죽음은 야광 기술 발전 뒤에 숨겨진 짙은 어둠이다.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퀴리 부인의 사인도 ‘라듐 방사능 중독’이었다. 지난 한 달간은 거의 매일 잠들기 전 시계의 두 번째 얼굴을 들여다봤다. 신비로운 모습에 매번 감탄하다가도 ‘라듐걸스’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렸다. 어둠 속 밝게 빛나는 시계를 보면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 교차한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