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를 밝히고 있다. 2019.10.25/뉴스1 © News1
25일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내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를 공식 선언하면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통상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오랜 기간 개도국 지위를 누릴 대로 누렸고, 사실상 혜택이 종료된 상황이어서 당장의 피해는 없고, 오히려 미국 등 여러 국가들과 마주하는 통상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농업 분야에 한정해 개발도상국 지위를 인정받았다. 현행 WTO 협정은 각국이 개도국임을 선언하면 관세나 보조금 등에서 우대(S&DT) 조항을 적용하도록 했다.
WTO 협정상 개도국 우대 조항은 지난해 기준 155개이다. 대표적으로 관세 우대를 받거나 국제 금융기관 대출,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특정 품목 수입 제한 등이 있다. 나머지는 개도국에 대한 기술지원 등이 대부분이라 실제 혜택이 크지 않다.
WTO 내 개도국 지위와 관련한 논란의 불씨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26일 경제발전이 빠른 국가를 상대로 WTO 개도국 지위를 내려놓으라고 압박하면서 90일 이내(10월23일까지)에 개도국 지위 관련 WTO 규정 개정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노린 대상은 중국이다. 미국 입장에선 중국의 경제발전 속도가 빨라 통상 측면뿐만 아니라 패권 유지 차원에서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해야 할 4가지 기준으로 Δ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Δ주요 20개국(G20) 회원국 Δ세계은행에서 분류한 고소득국가 Δ세계 상품무역 비중 0.5% 이상 등을 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4가지 기준 중 하나만 해당되더라도 개도국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고 압박했는데, 한국은 이 모든 기준을 모두 충족한 유일한 국가다. 미국이 중국을 노렸지만 우리로서도 개도국 지위를 계속 유지할 명분이 없는 셈이다.
자칫 ‘미국 대 중국’ 싸움에서 ‘미국 대 한국’ 싸움으로 변질될 우려 역시 크다. WTO 개도국 지위 유지를 통해 우리가 지켜낼 이익이 있다면 그런 전쟁도 감수해야겠지만 혜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중국 대신 미국과 전쟁을 치를 필요는 없다.
산업부 당국자는 “WTO 개도국 지위로 인해 얻는 혜택은 관세 감축이나 보조금 정도인데 이미 그런 혜택은 종료된 지 오래다”라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살아있는 유일한 협상인데 2004년도에 의무와 혜택 다 끝났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미 많은 국가들이 개도국 지위 포기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대만과 브라질,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UAE)가 개도국 특혜 포기의 뜻을 밝혔다. 싱가포르의 경우 자국은 이미 개도국 특혜를 누리고 있지 않으며 미국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일부에선 정부가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하면서 농업 분야에서 얻는 특혜가 곧바로 사라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지만 농업 분야 통상규범이 될 WTO 농업협상, 즉 도하개발어젠다(DDA)가 아직 타결되지 않아 당장의 피해는 없을 것으로 정부는 판단하고 있다.
앞서 정부는 이날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 주재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어 WTO 개도국 지위와 관련한 문제를 논의했으며, 앞으로 WTO 농업협상 때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하는 내용의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했다.
(세종=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