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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영화감독[이정향의 오후 3시]

입력 | 2019-10-26 03:00:00

<4> 아이번 라이트먼의 ‘데이브’




이정향 영화감독

26년 전 초라한 조감독 시절의 가을날, 극장을 나서며 이렇게 따뜻하면서도 재미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미국 소도시에서 직업소개소를 운영하는 평범한 40대인 데이브는 현직 대통령을 빼닮은 외모 덕에 대통령의 잡다한 행사를 뛰는 대역으로 발탁된다. 그가 첫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날,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는 국가적 변고가 일어난다. 당장 부통령에게 알려야 할 긴급 사안이지만, 대권의 꿈을 품은 비서실장은 부통령은커녕 대통령 부인도 속인 채 데이브를 허수아비 삼아 계략을 꾸민다. 솔직하고 겸손한 데이브 덕에 오히려 지지율이 치솟자 당황한 비서실장은 그를 제거하려 하지만 데이브는 자신의 역할을 멋지게 마무리한다.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단숨에 읽히는 책처럼 두 시간 내내 재미와 감동이 가득하다.

데이브를 다시 보니 대통령이란 직업이 영화감독과 닮았다. 감독은 자신이 가진 재주를 혼자서는 표현할 길이 없다. 타인의 능력을 알아보고, 걸맞은 역할을 맡기고, 최고치를 뽑아내도록 독려하고, 여러 명의 결과물을 조화롭게 버무리는 게 감독의 역할이자 재능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돼선 안 된다. 남의 돈인 제작비를 한 푼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되는 절약정신은 필수 덕목이다. 나 또한 감독이 되기 전엔 몰랐다. 이 자리가 얼마나 고독하고 무서운지. 불안을 토로하며 응석을 부려서도 안 된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한다. 핑계는 금물이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카메라의 세례를 받는다.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기보다 감시의 대상에 가깝다. 인기보다는 옳은 길을 고민해야 한다는 데이브의 마지막 연설은 리더를 꿈꾸는 이들에게 나침반이 될 것이다.

감독을 존경할수록 스태프와 배우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평소 데이브에게 고압적이던 경호원의 마지막 인사는 지금도 찡하다. 대역 초기에, 자신을 위해서도 총을 맞을 수 있느냐는 데이브의 질문에 답을 피하던 그가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데이브에게는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데이브를 보면 정치 엘리트 출신도 아니면서 쇠퇴기에 직면한 미국을 낙관주의와 신념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의 반열에 오른 배우 로널드 레이건이 생각난다. 극단적 진영 논리로 분열돼 서로를 헐뜯기만 하는 요즘의 우리에게 유머 감각이 풍부했던 레이건의 일화를 전하고 싶다. 임기 초기, 암살범의 총탄을 가슴에 맞은 그가 수술실에서 긴장한 의사들에게 농을 건넸다. “당신들 모두 공화당원이길 바라오.” 그러자 집도의가 울먹였다. “각하, 오늘은 우리 모두 공화당원입니다.”
 
이정향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