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반도체 후보로 주목
염한웅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자제어 저차원 전자계 연구단장(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오른쪽)과 김태환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원자 굵기의 인듐 선을 이용해 ‘솔리톤’이라는 물질을 구현했다. 꼬인 방향에 따라 3가지 솔리톤이 존재해 총 4가지 정보를 처리하는 다진법 반도체를 구현할 소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IBS 제공
최근 정부가 시스템반도체에 주목하면서 시스템반도체가 한국의 차세대 반도체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차세대 반도체에는 그 외에 다른 기발한 반도체도 많다. 최근 과학자들은 신경세포의 작동 방식을 흉내 낸 신경모방(뉴로모픽) 반도체와, 디지털과 전혀 다른 셈법인 3진법이나 4진법을 이용하는 다(多)진법 반도체를 연구하고 있다. 0과 1 두 가지 숫자로 정보를 처리하는 대신에 0, 1, 2의 세 가지 숫자나 0, 1, 2, 3의 네 가지 숫자로 정보를 처리하는 다진법 반도체는 세계적으로 한국 연구자들이 선두에서 개척하고 있는 반도체의 ‘블루오션’이기도 하다.
다진법 반도체는 현재의 반도체가 갖는 최대 약점 중 하나인 발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의 반도체 소자는 크기를 줄이면 양자역학적 효과로 전류가 원래 회로에서 다른 쪽으로 새어 나가는(누설전류) 문제가 있다. 이는 반도체의 소비전력을 증가시켜 열을 발생시킨다.
박진홍 성균관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이런 다진법 반도체를 개척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다. 박 교수는 “컴퓨터 내부의 중앙처리장치(CPU)를 보면 정보 저장과 연산을 담당하는 부분이 각각 있는데 현재는 모두 2진법 체계로 저장하고 처리된다”며 “패러다임을 바꿔 이들을 부분적으로 3진법이나 4진법, 5진법 반도체로 대체해 나가고자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는 반도체 회로를 구성하는 단위인 논리회로(게이트)를 구현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1이라는 정보가 들어오면 이것을 반대인 0으로 바꾸는 과정을 수행하는 ‘낫(NOT) 게이트’를 3진법이나 4진법 소자로 구현하는 식이다. 2017년에는 3진법으로 이런 논리회로를 만들었고, 9월에는 학부생인 임지혜 연구원과 함께 4진법으로 작동하는 논리회로를 만들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했다. 박 교수는 “현재 다진법 반도체 논리회로의 개념을 먼저 검증한 뒤, 실리콘이나 국내 기업이 개발한 산화물 반도체를 이용해 이를 구현하는 소자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김경록 울산과학기술원(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도 박 교수와 함께 다진법 반도체를 연구 중이다. 김 교수는 3진법으로 구동하는 상보성금속산화막반도체(CMOS·시모스)를 개발해 세계 최초로 대면적 실리콘 웨이퍼에서 구현하는 데 성공해 7월 ‘네이처 일렉트로닉스’에 발표했다. 김 교수 팀은 반도체 집적화를 방해하는 ‘골칫덩이’인 누설전류를 이용해 3진법을 구현하는 역발상을 했다. 누설전류의 양을 측정한 뒤 그 정도를 3단계로 나눠 각각을 하나의 정보를 표현하는 기본 단위로 삼는 식이다. 김 교수와 박 교수의 다진법 반도체는 미래 소자로서의 잠재성을 인정받아 2017년부터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으로 지원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사업부 팹(FAB)에서 미세공정으로 김 교수의 3진법 반도체 구현을 검증하고 있다.
좀 더 근본적으로 다진법 반도체를 구현하는 새로운 물질을 발굴하는 연구자도 있다. 다진법을 구현하려면 여러 종류의 정보를 표시하고 처리할 수 있는 다양한 상태를 보이는 새로운 물질이 필요한데, 이 물질을 개발하는 것이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