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률 성적표 나왔지만 “경제 견실”… 미래 기대 없으면 자본은 떠나간다
고기정 경제부장
문 대통령은 대신 “우리 경제의 견실함은 우리 자신보다도 오히려 세계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한국 경제의 견실함은 대부분 과거 정부가 남겨 준 유산이다. 연설에서 예로 든 세계경제포럼 국가경쟁력 평가의 거시경제 안정성은 재정과 외환보유액이 핵심 항목이다. 현 정부 들어 재정이 아낌없이 방출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건전하다고 평가 받는 건 경제개발 초기부터 나라곳간 채우는 데 노력해온 덕분이다. 정보통신 분야도 2년 연속 1위를 했다고 하는데, 이번 정부에서 뭘 했는지 의문이다.
현 정부 덕분에 한국 경제가 견실하다면 소득주도성장의 결과물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런데 한은의 성장률 통계에선 소주성의 결실로 민간소비가 늘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대통령은 최하위계층 소득이 증가했다고 했지만 취업으로 버는 돈인 근로소득은 오히려 크게 줄었다.
사실 시정연설 이후 만나본 기업인 중에 공정경제나 평화경제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기대가 없어서일 것이다. 자본은 현재의 수익률이 아닌 미래의 기대수익률을 보고 움직인다. 기대가 없으면 떠나기 마련이다. 우스갯소리로, 이미 회사를 해외로 옮겼으면 100점, 이제 옮기려고 준비하면 0점, 해외에서 국내로 유턴하려고 하면 마이너스 100점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사업장을 운영하는 한 지인은 “어떻게 탈출한 한국인데…”라며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동남아로 공장을 옮겼으면 옮겼지 한국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개인을 상대로 한 해외이민설명회마저 매번 만석인 걸 보면 기업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 대통령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시정연설에서는 이런 말이 한마디도 없었지만, 규제 풀어주고 노동개혁하고 산업구조조정도 서둘러야 한다. 그러려면 진단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혁신의 힘’이 살아나고 있다며 지난해 신규 벤처투자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하는 건 제대로 된 진단이 아니다.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은 “스타트업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주52시간을 훌쩍 넘겨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일할 권리를 국가가 빼앗고 있다”고 토로했다. 주력산업의 부진으로 시중 유동성 일부가 벤처로 흘러갔는데, 그나마 벤처들은 엉뚱한 제도적 규제로 발목이 잡혀 있는 형국이다.
성장을 포기했으면 모를까, 경제가 회복되길 바란다면 정책부터 바뀌어야 한다. 추월을 하려면 차선을 바꿔야 하듯 말이다. 소주성이 지나간 자리에 공정경제나 평화경제를 끼워 넣는 것은 정말 아니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