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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드라마 끝나자 관광객도 ‘뚝’… 애물단지 전락한 세트장[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19-10-28 03:00:00

전국 야외세트장 32곳 현주소
사극 열풍 불때 세트장 유치 붐… 지자체, 너도나도 “관광특수 보자”
세금 투입해 세트장 지었지만 제작사, 낡은 야외세트장 외면
만성적자 시달리고 유지비 허덕… “한류 붐-관광객 유치 현혹보다
타당성 조사 등 신중히 따져야”




26일 경기 구리시 고구려대장간마을(왼쪽 사진) 내부에 세워진 목조 건축물 사이로 깃발 소품이 널브러져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안시성’ 세트장으로 쓰인 이곳은 바로 옆 고구려유적전시관과 함께 아이들이 주로 현장학습차 방문한다. 이날 전북 부안영상테마파크 내 세트장에는 기울어진 한옥 담벼락을 쇠파이프가 떠받치고 있었다. 매표소, 카페 등 일부 시설을 제외한 세트장 내부에 안내 직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구리·부안=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신규진 문화부 기자

#1. “명소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정상이 아닌 것 같네요.”

26일 전북 부안영상테마파크 앞에서 만난 조모 씨(52)가 불안한 눈빛으로 ‘정상 영업 합니다’라고 써 붙인 표지판을 바라봤다. 북적여야 할 주말이었지만 이날 관광객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은 KBS ‘불멸의 이순신’(2004년), 영화 ‘왕의 남자’(2005년) 등 150편이 넘는 영화, 드라마의 세트장으로 사용된 곳으로 2005년 부안군이 70억 원(군비 40억 원)을 들여 만든 곳이다. 전북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내부는 황량했다. 정돈되지 않은 투호놀이 화살과 윷들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지난해 여름 끝난 야간축제 안내 패널이 바람에 흔들렸다. 촬영이 이뤄지는 한옥은 단청무늬 시트지가 떨어져 있거나 녹색으로 칠해진 평방(누각 상단을 가로지르는 부재)도 색이 바랬다. 심지어 일부 기울어진 한옥 담벼락을 쇠파이프가 아슬아슬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세트장 출구 앞에서 다시 만난 조 씨는 “입장료가 경복궁(성인 3000원)보다 1000원 비싸다니 믿기지 않는다”며 웃었다. 이날 총 입장객은 고작 150여 명이었다.

#2. “이게 다야?”

같은 날, 두 아이를 데리고 경기 구리시 고구려대장간마을을 찾은 김모 씨(40·여)는 10여 분 만에 이곳을 모두 둘러봤다. 지금까지 60만 명 이상이 다녀간, MBC ‘태왕사신기’(2007년), 영화 ‘안시성’(2018년) 등 굵직한 작품을 촬영한 나름 성공한 촬영지다. 구리시는 2008년 22억 원을 들여 세트장을 완공했다. 김 씨는 “일부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고 해도 촬영지가 너무 방치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입구에서 안내하는 직원이 없어 유치원에서 온 아이들과 등산객 등 50여 명이 우왕좌왕했다. 구리시는 2014년부터 무료로 세트장을 개방했다. 이날 만난 관광객들은 “돈을 내면 아까울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한때 드라마나 영화의 인기를 발판삼아 지역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던 야외 세트장들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적더라도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이 두 곳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대부분의 세트장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답이 없는 문제”라는 말이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올 정도다.

○ 잘해봐야 현상 유지, 못하면 폐관

드라마, 영화 세트장 붐은 2000년대 초 시작됐다. KBS ‘태조왕건’(2000년)의 성공으로 경북 문경시가 관광 특수를 누렸고, 이때부터 다른 지자체들도 경쟁적으로 방송사와 제작사를 끌어들여 세트장 유치에 착수했다. 제작사의 요구에 따라 지자체는 촬영의 편의를 제공했고 주민 예산으로 세트장을 지어줬다.

박인숙 자유한국당 의원실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제출받은 ‘전국 야외 및 실내 세트장 현황(8월 기준)’에 따르면 현재 운영 중인 야외 세트장 32곳 가운데 24곳이 2010년 이전 지어졌다. 순수 민간자금으로만 세워진 세트장은 2곳(비공개 3곳 제외)에 불과했다. 한 지자체 관계자의 말처럼 “그때는 세트장을 향후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기본 계획과 장기적인 안목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2001년 경남 하동군이 38억 원을 들여 만든 최참판댁 토지세트장은 SBS ‘토지’(2004년), MBC ‘해를 품은 달’(2012년) 등의 배경이 됐다. 한때 연간 50만 명 이상 관광객이 찾던 곳이다. 2011년 40억 원을 들여 세트장을 리모델링했지만 관광객의 발길은 줄고 있다. 하동군 관계자는 “리모델링 이후 흑자가 난 적이 없다. 정비 작업에 예산이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최근 하동군은 주변에 숙박시설 건설과 체류형 관광지 조성을 통해 세트장 살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KBS ‘태양의 후예’(2016년) 드라마 세트장을 운영 중인 강원 태백시도 내년 세트장 인근에 준공 예정인 ‘슬로우’ 레스토랑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있다. 예상치 못한 드라마의 인기에 당시 3억2000만 원의 시비를 들여 철거한 세트장의 일부 건물을 재건했지만, 2017년 14만 명까지 치솟은 관광객은 지난해 12만 명, 올해 6만 명으로 계속 줄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매년 열린 ‘태백커플축제’도 송중기, 송혜교 ‘송송커플’의 이혼으로 올해 취소됐다. 태백시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세트장에 투자한다고 그만큼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했다. 매년 3000만 원가량의 유지비가 이 세트장에 투입되고 있다.

세트장 운영을 민간업체에 위탁한 지자체들도 상당수. 좀 더 효율적인 운영을 한다는 목적이지만 지역에선 “혈세를 들여 만든 세트장 수익을 업체가 다 가져간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2006년 경북 문경시가 60억 원을 들여 지은 가은오픈세트장은 지난해부터 민간업체에 위탁료를 받지 않고 운영을 맡겼다. 매년 6억 원가량 유지비가 투입됐던 세트장을 인근 대규모 테마파크 운영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문경시 관계자는 “민간업체의 마케팅으로 지역이 활성화되면 결국 주민들에게도 이득이 된다”고 설명했다. 부안군은 지난해부터 부안영상테마파크 운영을 민간업체에 맡겼지만 관광객이 줄면서 사용료 미납 문제로 업체와 지자체 간 소송이 진행 중이다.

지자체의 갖은 노력에도 회생이 불가능한 세트장은 끝내 폐관 수순을 밟게 된다. 2005년 17억 원을 들인 부안 석불산영상랜드는 한 문중 소유였던 부지의 사용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촬영 문의와 관광객이 계속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부안군은 3억 원을 들여 세트장을 철거했다.

○ 세트장 수요 늘지만 낡은 야외 세트장은 외면

일부 지자체에선 10년 이상 된 세트장이 외면받는 이유를 “예전만 못한 사극의 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사극 붐이 일면 언제라도 회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드라마, 영화 업계에선 “항상 세트장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상황이지만 노후화된 세트장은 꺼리는 편”이라고 입을 모은다. 제작사 입장에선 관리가 잘돼 있는 민속촌을 대관하거나 작품 특성에 맞게 세트를 신규 부지나 실내 스튜디오에 짓는 것을 선호한다. 세트장 수요는 늘지만 옛 세트장 대관이 줄어든 ‘미스매치’가 심화된 이유다.

실제로 계약 기간에 세트를 지어 촬영을 마치고 철거하는 실내 스튜디오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운영 중인 대전 유성구 스튜디오큐브의 올해 가동률은 108.3%로 지난해 평균 가동률 94.5%를 초과했다. 한 실내 스튜디오 관계자는 “비바람 등 외부 영향이 거의 없는 스튜디오도 2년만 지나면 보수가 필요한데, 야외는 오죽하겠냐”라고 했다. “보수도 제대로 되지 않은 옛날 세트장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게 현실”이라는 한 영화 제작사 관계자의 말도 야외 세트장의 암울한 미래를 짐작하게 한다.

이미 지어진 세트장 내 콘텐츠를 개선하려는 지자체의 눈물겨운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다. 문경시는 세트장에서 기존 드라마의 일부 장면을 증강현실(AR) 등으로 보여줄 계획을 세웠지만 배우들의 소속사, 방송사, 제작사 등 복잡하게 얽힌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운영이 어려운 세트장에 저작권 비용을 대기 어려운 지자체는 결국 드라마 장면을 기술한 나무 팻말만 수년째 방치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 ‘폭탄 인수인계’ 그만둬야

세트장 운영을 관리하는 지자체 담당자들도 “수도권에 비해 접근성도 떨어지고 관광객이 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적극적인 예산 투입을 요청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세트장 업무를 엉겁결에 떠안은 공무원 입장에선 관성적이고 소극적인 운영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세트장 폐관을 건의하기도 어렵다. 지자체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낡은 세트장이 향후 지자체에 미칠 영향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수억, 수십억 원이 들어가는 세트장 건설에 대해 타당성 연구용역을 시행하는 지자체가 거의 없다. 기존 세트장도 비용과 발전 가능성을 따져 부족하다 싶으면 과감히 폐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드라마에 대한 인기는 방영 당시 폭발적이지만 그에 대한 시청자의 기억이 1년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세트장을 지을 때는 장기 프로젝트로 구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명량’(2014년)의 후속작인 ‘한산’, ‘노량’ 세트장 건설을 추진 중인 전남 여수시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제작사의 요구로 세트장 건설을 추진하던 여수시는 도로 개설 비용과 부지 임대 기간 문제로 여수시의회와 갈등을 겪고 있다. 서완석 여수시의회 의장은 “이미 세트장 내 가건축물이 ‘무용지물’이 된 선례를 보고도 시가 타당성 조사 등 해당 부지의 종합개발계획이 없다는 건 무책임하다”고 했다.

제작사의 부풀리기식 장밋빛 전망과 지자체의 치적 쌓기 경쟁이 ‘애물단지’ 야외 세트장 사태를 불러온다. 경제성에 대한 신중한 고려 없이 ‘한류 붐’이나 ‘관광객 유치’ 같은 말에 현혹돼 지자체의 혈세를 낭비하는 과오가 되풀이돼선 안 된다.

신규진 문화부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