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이런, 또 넘어졌어.”
레돔이 몰고 다니던 관리기가 또 뒤집어져버렸다. 관리기가 문제인지 땅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둘 다의 문제다. 포크레인으로 작약을 파내간 땅은 난폭하게 패여 있고 관리기는 튼실하지 못하다. 이런 조그만 관리기는 100평 정도의 땅에나 사용하지, 1000평이 넘는 땅에는 주로 트랙터로 왔다 갔다 하면 금방 끝난다고 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는다. 경사진 언덕을 오가는 기계가 고장날까봐 걱정이고 그가 다칠까봐 걱정인 나는 전전긍긍한다.
레돔은 낑낑거리며 관리기를 일으켜 세워 다시 시동을 건 뒤 나아간다. 고슬고슬한 땅, 충주 근방에서는 최고의 흙을 가진 농부, 레돔. 이런, 관리기가 또 깊은 흙구덩이에 빠져 넘어져버렸다. 그는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입술이 바싹 말랐고 곧 병이 날 것만 같다.
“11월이 오기 전에 땅 갈기를 마쳐야 하는데 생각보다 더디네. 내일은 밭고랑을 만들어야 포도나무를 옮겨 심을 수 있을 텐데. 밭에 돌이 너무 많네. 저 돌들을 좀 옮겨줄래?” 나는 쪼그려 앉아 돌을 주워 옮기고 그는 관리기를 끌고 비탈진 길을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내려온다. 헥헥거리는 폼이 힘들어 보인다. 관리기에 익숙한 사람을 고용하면 하루 만에 끝날 수 있다고 권유했지만 그는 땅 일구는 일만은 남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 이런. 이번엔 톱니가 나가버렸네. 큰일났다.” 나는 보온통에서 따뜻한 물을 한잔 따라준다. 그는 물을 마시며 산을 보고 하늘을 본 뒤 미래의 포도밭을 한 바퀴 돌더니 언덕 끝에서 손짓하면 나를 부른다. “햇빛을 하루 종일 잘 받으려면 포도나무 골을 이렇게 둥근 사선으로 그어야할 것 같아. 그래야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도 덜 받지. 그리고 경사진 저 면은 비가 와도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이렇게 가로로 하는 것이 좋겠어. 지금 이 상태는 천둥번개라도 치면 흙들이 다 유실되어버릴 거야. 맨 위쪽은 포도나무 사이를 2m로 넓게 잡았어. 사람들이 저 쪽 바위를 산책하다가 이쪽으로 쉽게 넘어올 수 있도록 말이야.”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잔잔하게 미소 짓는다. 미래의 수안보 떼루아 포도밭 풍광이 이미 눈앞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갈 길은 참으로 멀다. 관리기와 며칠 씨름하더니 결국 몸살이 났다. 이틀을 앓더니 새벽같이 농기계 임대소에 가서 밭고랑 치는 기계를 빌려 바삐 밭으로 간다. 기계에 시동을 걸기 전에 다정한 얼굴로 밭을 한 바퀴 휘 돌아본다.
농부는 참으로 꿈이 많고 그 아내는 힘껏 내조해야겠다고 착하게 다짐하는 가을이다.
신이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