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이런, 또 넘어졌어.”
“트랙터로 쉽게 땅을 갈 수 있겠지만 너무 무겁다는 것이 문제야. 무거운 기계로 왔다 갔다 하면 땅이 딱딱하게 붙어버리지. 그러면 땅속 미생물도 죽고 식물은 깊이 뿌리를 내리지도 못해. 비라도 오면 땅은 더욱더 굳어져 벽돌처럼 단단해져버리지. 이런 땅에 비료 뿌리고 제초제 치고 영양제로 듬뿍 도포를 한 뒤 비닐까지 꽁꽁 덮어주다니…. 아, 내가 땅이라면 정말이지 미쳐버릴 거야. 가엾은 흙들. 나는 너를 노래하는 땅으로 만들어 줄 거야.”
레돔은 낑낑거리며 관리기를 일으켜 세워 다시 시동을 건 뒤 나아간다. 고슬고슬한 땅, 충주 근방에서는 최고의 흙을 가진 농부, 레돔. 이런, 관리기가 또 깊은 흙구덩이에 빠져 넘어져버렸다. 그는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입술이 바싹 말랐고 곧 병이 날 것만 같다.
“11월이 오기 전에 땅 갈기를 마쳐야 하는데 생각보다 더디네. 내일은 밭고랑을 만들어야 포도나무를 옮겨 심을 수 있을 텐데. 밭에 돌이 너무 많네. 저 돌들을 좀 옮겨줄래?” 나는 쪼그려 앉아 돌을 주워 옮기고 그는 관리기를 끌고 비탈진 길을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내려온다. 헉헉거리는 폼이 힘들어 보인다. 관리기에 익숙한 사람을 고용하면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고 권유했지만 그는 땅 일구는 일만은 남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 이런. 이번엔 톱니가 나가버렸네. 큰일 났다.” 나는 보온병에서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준다. 그는 물을 마시며 산을 보고 하늘을 본 뒤 미래의 포도밭을 한 바퀴 돌더니 언덕 끝에서 손짓하며 나를 부른다. “햇빛을 하루 종일 잘 받으려면 포도나무 골을 이렇게 둥근 사선으로 그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도 덜 받지. 그리고 경사진 저 면은 비가 와도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이렇게 가로로 하는 것이 좋겠어. 지금 이 상태는 천둥번개라도 치면 흙들이 다 유실되어버릴 거야. 맨 위쪽은 포도나무 사이를 2m로 넓게 잡았어. 사람들이 저쪽 바위를 산책하다가 이쪽으로 쉽게 넘어올 수 있도록 말이야.”
“지난주 뿌린 호밀 씨앗이 벌써 한 뼘이나 자랐어. 새벽이슬을 먹고 발아했나 봐. 앗, 골잡이로 세워둔 막대 위에 새가 앉았네! 새들을 위해 어서 빨리 나무를 심어야겠어. 포도나무 심고 난 뒤 바로 나무 시장에 가보자. 저쪽 바위 쪽엔 무화과나무를 심고, 이쪽엔 보리수나무를 심어야 해. 보리수나무는 정말 빨리 자라거든. 차를 만들어 마실 수도 있고….”
농부는 참으로 꿈이 많고 그 아내는 힘껏 내조해야겠다고 착하게 다짐하는 가을이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