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 박사 재조명한 평전 출간 “3·1운동은 애국심의 본보기” 한글, 거북선, 기록문화 등 한국인의 우수성 높이 평가 ‘헤이그 특사’로 감시 받으면서 美에 일제 만행 알리려 분투
신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에서 새로 소개한 헐버트 박사 관련 신문기사들. 왼쪽 사진은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 중 하나”라고 말한 1949년 7월 2일 미국 스프링필드유니언 인터뷰 기사. 가운데 사진은 고종과 헐버트 박사가 눈물어린 전보를 주고받았다고 보도한 뉴욕타임스 1905년 12월 13, 14일자. 오른쪽 사진은 박사의 아내 메이 헐버트의 1910년 5월 7일 뉴욕트리뷴 인터뷰 기사로, 제목은 ‘미국 여인,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증언’이다. 김동진 회장 제공
일제는 2년 전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모자로 박사를 지목했다. 박사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특사증과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황제의 친서를 소지한 채 한국을 떠났다. 당시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은 서울의 통감부, 일본 외무성 등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미국에 가서는 일제의 침략을 알리는 여론전을 폈다. 스티븐스 저격 사건으로 반한 여론이 상당한 가운데 박사는 뉴욕타임스(NYT) 등을 통해 외롭게 한국을 옹호했다. 황후를 살해하고, 황제를 폐위한 일본이었다. 박사가 미국인이라고 해도 이번에 한국에 돌아오면 신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박사의 한국 입국 뒤 NYT는 “박사가 암살 표적이 됐다”는 전언을 보도했다.
신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김동진 지음·참좋은친구)를 통해 들여다본 박사의 삶 가운데 한 장면이다. 저자가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2010년) 이후 10년 가까이 자료를 추적해 보완한 박사의 삶이 촘촘하게 담겼다. 유서도 박사의 외손녀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저자가 찾아낸 1949년 7월 미국 ‘스프링필드유니언’지에 실린 헐버트 박사의 인터뷰다. 찢어지게 가난한 작은 신생 독립국 국민을 평가하는 표현이었으니 ‘황당한 소리’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박사는 확신했다. “한국인은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했고, 임진왜란 때 거북선으로 일본군을 격파해 세계 해군사를 빛냈으며, (조선왕조실록같이) 철저한 기록 문화를 지니고 있다”며 사례를 거론했다. 무엇보다도 “3·1운동으로 보여준 한민족의 충성심(fealty)과 비폭력 만세 항쟁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고 강조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이 25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의 헐버트 박사 무덤에서 신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헌정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부인 메이 헐버트가 일제의 침략을 고발한 인터뷰 기사도 책을 통해 공개했다. 메이 헐버트는 뉴욕트리뷴 1910년 5월 기사에서 “한국의 상류층은 일본 상류층에게 굴욕을 당하고, 한국 노동자들은 일본 노동자에게 좌우로 두들겨 맞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증언했다.
‘헐버트의 꿈…’에는 목숨을 걸고 한국을 사랑한 박사의 삶이 드러난다.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 한글 전용의 선구자, 한국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민권운동가 등 박사의 다양한 면모를 각종 기고문과 편지, 저서, 회고록을 통해 재조명했다. 박사가 출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의 출간 시기가 1891년 1월이라고 확인하기도 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헐버트의 삶은 한국사이자 한민족 자산”▼
“호머 헐버트 박사의 삶은 한국사의 일부이고, 한민족의 자산입니다. ‘외국인의 부차적인 도움’ 정도로 치부할 대상이 아니에요.”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의 저자인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69)은 25일 이렇게 강조했다. 기자가 “이름을 듣고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라고 말을 흐리자 나온 답이었다.
김 회장은 “고종의 밀사는 일제에 목숨을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며 “헐버트 박사는 나중에 일제에 의해 추방돼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전역을 돌며 수천 회 강연하고 언론에 기고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강조했다. 친한파가 적었던 미국 지성사회에서 박사가 얼마나 외롭게 투쟁했는지, 김 회장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했다.
헐버트 박사는 별세 뒤인 1950년 건국훈장 태극장을 받았고, 태극장은 상훈체계가 바뀌면서 나중에 독립장으로 변경됐다. 독립장은 5등급의 건국훈장 가운데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에 이어 세 번째다. 한국에 대한 박사의 공을 생각하면 서훈 등급을 올려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의견이다. “1950년 서훈 당시 공적 조사를 못했을 겁니다. ‘일사부재리’라는 형식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심사를 제대로 해야 해요.”
김 회장은 여전히 ‘사라진 고종의 비자금’을 추적하고 있다. “1908년 일본이 독일 은행에서 찾은 돈을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주라고 부통감이 지시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실제 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완용에게 줬다면 고종이 과연 몰랐을까요?”
실제 고종은 1909년 내탕금(임금의 개인 재산)을 찾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관련 서류를 헐버트 박사에게 줬다. 박사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 서류들을 1948년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김 회장은 “내탕금을 찾는 건 박사의 한을 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