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상처가 때로는 예술의 질료가 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 시인 리영 리의 경우도 그렇다. 리의 가족은 인도네시아에 반중 감정이 고조되던 1964년 홍콩과 마카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마주한 것도 차별이었다.
그의 시 ‘감’은 그것을 회고하면서 시작된다. “육학년 때 워커 선생님은/내가 퍼시먼(persimmon)과 프리시전(precision)을 구별할 줄 모른다며/뒤통수를 때리고/구석에 서 있게 했다.” 소년은 주눅이 잔뜩 들어 퍼시먼과 프리시전, 즉 감과 정밀함을 혼동하고 벌을 서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보니 감과 정밀함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내와 색깔로 익은 감을 알아보고, ‘속살이 다치게 않게 껍질을 살포시 벗겨/홍시의 속까지 먹는’ 데 필요한 게 정밀함 아닌가.
그걸 모르는 건 미국인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감을 가져와 칼로 자르더니 한 조각씩 나눠주며 ‘중국 사과’의 맛을 한번 보라고 했다. 홍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으로 껍질을 벗겨 먹어야 하는 떫은 감을 칼로 잘라서 준 것이었다. 그 선생님의 말과 생각, 행동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감의 속성을 알지도 못하면서 사과를 보는 기준으로 감을 보는 인식의 폭력, 즉 오리엔탈리즘이었다. 그 선생님과 달리 시인의 아버지는 감을 속속들이 알았다. 눈을 감고도 감을 화폭에 담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 냄새/손바닥에 놓인 감의 질감/익었을 때의 무게 같은 것들은/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법’이라며 시력을 잃고서도 감을 그릴 수 있었다. 그것이 권위이고 정밀함이었다.
소년은 시인이 되어 유년시절의 상처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감은 동양이었다. 그는 서양이 자기중심적인 편협함 때문에 보지 못하는 동양의 정서와 문화, 정신을 감에서 보았다. 그러면서 유년시절의 상처는 자연스레 치유가 되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