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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의 추억[횡설수설/구자룡]

입력 | 2019-10-30 03:00:00


미국 모토로라가 1958년 처음 속칭 ‘삐삐’라고 부르는 무선호출기를 개발했을 때는 신호음만 울렸다. 수신자는 미리 정해진 곳으로 전화를 걸어 호출에 답했다. 1982년 한국에 모토로라 삐삐가 처음 수입돼 들어올 때는 화면에 자신을 호출하는 전화번호가 표시됐다. 삐삐는 ‘단방향’이기는 하지만 많은 이에게 무선통신 시대를 경험하게 해준 첫 기기로 사랑을 받았다. 시판 초기엔 30만∼40만 원으로 고가품이었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95%를 넘어서는 요즘 젊은 세대 중에는 “삐삐가 뭐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삐삐 가입자 수가 휴대전화 가입자에게 추월당한 것은 1998년 9월로 21년 전 일이다.

▷영어로는 ‘페이저’ ‘비퍼’ 등으로 불린 삐삐는 신호를 받을 때 나는 ‘삐삐 삐삐’ 소리가 반복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삐삐∼’ 소리는 외근사원들에겐 사무실 윗사람의 불호령을 예고하는 호출이고, 연인들에겐 사랑의 호출이었다. ‘8282’(술 마시는 남편 호출), ‘1004’(연인 사이의 천사), ‘0404’(영원히 사랑해) 같은 호출 번호만 봐도 뜻을 알았다. 스마트폰의 영상통화 기능만큼 감시가 가능한 ‘빅 브러더’는 아니지만 삐삐로 어디서든 불러내 ‘×목걸이’ ‘족쇄’라는 악명도 얻었다. 처음에는 전화번호나 간단한 문자메시지만 표시됐으나 스톱워치, 자동차 원격제어, 날씨 안내, 프로야구 속보 등 기능이 다양해졌다. 매일 짧은 글을 호출기로 보내는 ‘삐삐 소설가’도 등장했고 전 세계 어디서든 호출이 가능할 정도로 진화했다.

▷하지만 삐삐가 온갖 부가 기능을 추가하며 생존의 몸부림을 쳤음에도 그 끝은 사실상의 멸종이었다. 휴대전화가 급속도로 보급되는 ‘IT 세계의 기후 변화’를 이겨내지 못해 마치 봄눈 녹듯 사라졌다. 1997년 5월 국내 삐삐 사용자가 약 1360만 명으로 보급률 30%를 차지하며 보급률 기준 세계 1, 2위를 차지한 것을 정점으로 급격히 줄어들어 1998년 상반기에만 200만 명 이상이 삐삐를 없앴다.

▷1990년대 후반 국내 삐삐 시장의 90% 이상을 석권해 ‘삐삐왕’으로도 불렸던 텔슨전자의 김동연 전 대표(61)가 2005년 회사 파산 후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옛 사옥 지하에 꾸려온 헬스클럽마저 월세 분쟁으로 29일 강제 철거를 당했다. 김 전 대표는 “몇 가지 요인이 겹쳤지만 사업 부진 배경에는 삐삐 시대, 아날로그 시대의 종언도 한 이유”라고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다 급속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삐삐의 추억에서 무선통신 시대의 냉혹하고 치열한 경쟁과 급속한 세대교체를 절감한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