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페이저’ ‘비퍼’ 등으로 불린 삐삐는 신호를 받을 때 나는 ‘삐삐 삐삐’ 소리가 반복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삐삐∼’ 소리는 외근사원들에겐 사무실 윗사람의 불호령을 예고하는 호출이고, 연인들에겐 사랑의 호출이었다. ‘8282’(술 마시는 남편 호출), ‘1004’(연인 사이의 천사), ‘0404’(영원히 사랑해) 같은 호출 번호만 봐도 뜻을 알았다. 스마트폰의 영상통화 기능만큼 감시가 가능한 ‘빅 브러더’는 아니지만 삐삐로 어디서든 불러내 ‘×목걸이’ ‘족쇄’라는 악명도 얻었다. 처음에는 전화번호나 간단한 문자메시지만 표시됐으나 스톱워치, 자동차 원격제어, 날씨 안내, 프로야구 속보 등 기능이 다양해졌다. 매일 짧은 글을 호출기로 보내는 ‘삐삐 소설가’도 등장했고 전 세계 어디서든 호출이 가능할 정도로 진화했다.
▷하지만 삐삐가 온갖 부가 기능을 추가하며 생존의 몸부림을 쳤음에도 그 끝은 사실상의 멸종이었다. 휴대전화가 급속도로 보급되는 ‘IT 세계의 기후 변화’를 이겨내지 못해 마치 봄눈 녹듯 사라졌다. 1997년 5월 국내 삐삐 사용자가 약 1360만 명으로 보급률 30%를 차지하며 보급률 기준 세계 1, 2위를 차지한 것을 정점으로 급격히 줄어들어 1998년 상반기에만 200만 명 이상이 삐삐를 없앴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