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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한 야당은 재앙이다[글로벌 이슈/하정민]

입력 | 2019-10-30 03:00:00


영국 제1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는 3년 4개월째 이어진 유럽연합(EU) 탈퇴 논란에서 뚜렷한 비전과 철학을 제시하지 못해 집권 보수당 못지않은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하정민 국제부 차장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시점이 또 미뤄졌다. 올해만 세 번째. 원래 3월 29일이 예정이었지만 4월 12일, 10월 31일, 내년 1월 31일로 주야장천 밀렸다. 벌써부터 내년 1월 말 일정의 연장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러다 10년 후에도 기한 연장만 할 판이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가결 후 영국 정치는 사실상 뇌사 상태에 빠졌다. 최대 책임은 집권 보수당에 있지만 제1야당 노동당도 비전을 제시하진 못했다. 현재 하원 650석 중 보수당과 노동당의 의석은 각각 288석, 244석이다. 1월에는 63석 차이였지만 보수당의 자중지란 및 잇단 탈당에 44석으로 줄었다. 10여 개의 군소정당을 잘 규합하면 수권(受權)이 가능했겠지만 노동당은 하지 못했다.

브렉시트 정국에서 보수당 대표는 데이비드 캐머런,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으로 바뀌었다. 노동당은 2015년 9월부터 지금껏 제러미 코빈 대표(70)가 이끌고 있는데도 왜 그럴까. 이는 코빈의 ‘같기도’ 리더십에 기인한다. 그는 찬성도 반대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만 취했다. “EU는 모든 문제의 근원도, 번영의 원천도 아니다. 브렉시트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없지만 브렉시트를 한다고 영국이 나락으로 떨어지지도 않는다.” 개그 프로그램에선 웃길지 모르나 정계 2인자의 발언으로는 초라하고 군색하다. 우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코빈파’(극좌파)와 ‘블레어파’(온건좌파)로 쪼개진 당 상황도 이를 부추긴다. 노조가 최대 지지 기반인 코빈파는 EU 체제가 저소득층 일자리를 뺏고 대도시 엘리트의 배만 불렸다고 본다. 국민투표 때 당론이 EU 잔류였는데도 코빈이 지지 연설을 주저했던 이유다. 성장과 분배를 결합한 ‘제3의 길’로 1997년부터 10년간 집권했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국민투표 재실시를 통한 EU 잔류’를 외친다. 아직 상당한 세력이 있는 그는 자신의 재단을 통해 잔류파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왔다. 그가 비밀리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EU 수뇌부에 영국의 잔류 방안을 지도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두 파는 반(反)보수당, 반존슨을 제외하면 한배에 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서로 적대시한다.

코빈은 둘 사이에서도 우왕좌왕했다. 9월 코빈파 평당원들이 EU 잔류를 주장한 톰 왓슨 부대표를 내쫓으려 했다. 논란 끝에 축출을 위한 표결은 취소됐지만 이때도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차마 자신이 직접 못했던 반대파 제압의 깃발을 당원들이 들었다면 못 이기는 척 표결을 실시해 부대표를 쫓고 자신의 노선을 강화해도 됐다. 그게 아니라면 당의 수장으로서 반대파를 다독여야 했다. 그 대신 그는 블레어 전 총리가 폐기했던 국유화 관련 당규 부활을 거론해 블레어파와 더 멀어졌다.

기간산업 국유화, 부유세, 평등 및 무상교육을 주장하는 코빈은 노동당에서도 가장 왼쪽에 있다. 2016년 출간된 그의 평전 제목도 ‘코빈 동지(Comrade Corbyn)’. 콤래드는 공산당이나 사회당원들이 서로를 부르는 명칭이다. 1983년부터 36년째 런던 저소득층 지역인 이즐링턴 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남의 집 페인트칠까지 해주며 주민과 동료를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하지만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려 한다는 이유로 두 번째 아내와 이혼했다. 인간적으로는 선량하고 자상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외골수에 타협을 모른다. 당 안팎으로 집토끼와 산토끼를 다 잡으려다 집토끼마저 잃을 처지에 몰린 그의 성향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인들은 코빈이 보인 애매함이 정치공학적 계산에 기반한 고도의 전략이 아닌 일종의 결정장애임을 알아 버렸다. 20, 21일 유고브 여론조사에서 43%는 ‘총리로 존슨이 최선’이라고 했다. 코빈을 말한 이는 20%에 그쳤다. 존슨 총리가 7월 취임 후 파국이 뻔한 노딜 브렉시트(합의안 없는 EU 탈퇴) 및 조기 총선만 고수하며 혼란을 더 부추겼는데도 코빈을 그 대체재로 안 본다는 얘기다.

‘영국의 트럼프’ 존슨 총리는 각종 막말과 기행, 계속되는 악수에도 지리멸렬한 야당을 둔 덕에 굳건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일반 영국인, 지루한 브렉시트 논란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계 경제는 무슨 죄일까. 집권 가능성이 낮은 불임 정당은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만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