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500% 인상’ 청구서 논란 양국 28년간 10차례 협상테이블… 방위비 인상률 2.5~25.7% 오가 美, 지난달 11차 협상 시작되자 48억달러 규모 인상카드 내밀어 올 2월 10차 체결액의 5~6배… 미군 인건비 등 부담 요구한 듯 연내 타결 안되면 기존 협정 연장… 해리스 “시간끌기 나쁜 전략” 견제 美 여론 주도층과 소통 강화하고 장기적 공동이익 논의 심화 시급
미국 제3함대 소속 핵항공모함 칼빈슨함 비행갑판에서 날아오르는 F/A-18 전투기.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체결을 위한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가운데, 미국이 이런 미군 전력자산의 한반도 전개 비용까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에 포함시키려 한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DB
한기재 정치부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해 5월 플로리다주 패너마시티 유세에서 나라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채 내놓은 폭탄 발언의 일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비판했다는 분석이 많았지만 중동 매체 알자지라는 한국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를 겨냥한 것이란 관측을 앞세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내심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50억 달러’ 청구서의 대상이 한국이 아니길 바란다는 외교가의 희망 섞인 관측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외교 당국은 ‘올 것이 왔다’며 알려진 것 이상으로 바짝 긴장했다. 워싱턴발 방위비 폭풍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달 말,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체결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자 미국의 인상 압박은 현실이 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하는 방위비 총액이 앞서 5월 유세에서 언급됐던 금액과 거의 같은 48억 달러 규모라는 윤곽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 美 원칙 뒤엎는 사상 초유의 ‘500% 인상’ 요구
최근 미 국방부 전직 당국자의 회고록을 통해 공개된 트럼프 대통령의 방위비 ‘600억 달러’(약 70조 원) 요구는 과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나 48억 달러에 대한 근거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기존 SMA 협상 틀에 따르면 분담금이 사용되는 항목은 △한국인 군무원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에 국한된다. 이 세 가지 항목만 고려한다면 48억 달러란 계산은 나오기가 어렵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SMA 틀을 송두리째 엎어 버리겠다고 나선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 국방부 차관실이 올 3월 발표한 2020년 회계연도에 대한 ‘전략·유지관리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 인건비와 운용·유지비(operation and maintenance) 등을 포함한 내년도 한국에서 발생되는 미군의 총 운용비는 44억6400만 달러다.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SMA의 틀에 포괄되지 않는 이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한 이 액수에서 제외된 괌 등 미국 영토에서 발생되는 전략폭격기 및 핵잠수함 등 전략자산 전개 비용 등을 추가로 얹어 요구하면 48억 달러란 계산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아직 총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대폭 인상을 원하는 미국 측의 압박이 본격화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제10차 협상 때는 전략자산 전개 비용과 한미 연합훈련 등에 대한 비용 요구를 철회했지만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든 받아내려 할 것”이라고 기류를 전했다. 예를 들어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협상 과정에서 이미 정해진 연간 훈련에 따른 전략자산 전개 비용은 미리 산출하고,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긴급 전개되는 전개 비용은 사후 청구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도 비슷한 요구를, 더 강력하게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韓은 일단 ‘시간 끌기’ 작전
‘미국 우선주의’ 슬로건을 앞세우며 공세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이지만 아킬레스건도 있다. 바로 협상 시간의 문제다. 올해 2월 타결된 제10차 협정에서 한미는 ‘이 협정의 유효기간이 다하는 연내까지 차기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합의 아래 기존 협정에 대한 연장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합의했다. 분담금 총액에 대한 동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기존 협상의 연장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 이런 연장 협상에선 상대적으로 미국이 급격한 인상안을 꺼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국내 분석도 나온다.
이런 국내의 관측을 아는 미국은 연신 협상의 속도감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지난달 말 서울에서 열린 제11차 협상의 1차 회의에선 이런 기류가 구체적으로 감지되기도 했다. 미국의 드하트 대표가 한국에서 신임 대표가 나오지 않고 제10차 협상을 담당했던 장원삼 전 대표가 나오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밝힌 것. 새 협상 대표를 늦게 임명하는 지연술을 쓰지 말라고 공개 경고한 것으로 해석됐다. 급기야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아예 “(한국 측이) ‘내년으로 넘어가겠지’라고 기대하는 것은 나쁜 전략”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 ‘동맹 경시’ 씁쓸한 뒷맛은 어떻게 씻어낼까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치로 알려진 48억 달러가 워낙 큰 액수이다 보니 이대로 관철되기는 힘들 것이란 말이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도 나온다. 해리스 대사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한미의 입장) 그 중간 어디쯤에서 절충안으로 협상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절충안’이 48억 달러의 절반인 20억∼30억 달러 수준이라면 여전히 한국 국민을 납득시킬 논리를 찾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남는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방위비가 하루아침에 1조 원에서 3조 원이 된다면 동맹에 대한 피로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우리로선 인상에 대한 약속은 하더라도 (지불에 대한) 약속은 ‘5년 후 3조 원을 내겠다’는 식으로 최대한 뒤로 미루는 편이 좋다. 미국 내 정권 교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협정 타결 후엔 어쩔 수 없이 남게 될 씁쓸한 뒷맛을 씻어내야 하는 과제도 생긴다. 백인 노동자층 등 골수 지지층을 등에 업은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민낯이 적나라하게 노출됐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도 걱정의 목소리가 높다. 존 햄리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소장은 9월 말 방한 당시 강연에서 “(중국의 부상 등으로) 한미동맹이 더 중요해진 시기인데, 오히려 이 중요성에 대한 의식이 미국에서 낮아져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결국 햄리 소장과 같이 동맹의 중요성을 여전히 분명히 인식하는 미국 내 여론 주도층과의 소통을 강화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격화된 방위비 분담금 논쟁 등 눈앞의 머니 이슈를 넘어 좀 더 장기적인 양국 간 공동의 이익에 대한 논의를 심화할 필요성도 있다. 고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전략은 백인 노동자 지지층 외에는 지지를 잘 얻지 못한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향후 이렇게까지 돈을 요구하는 정부는 안 나타날 것”이라며 좀 더 장기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한기재 정치부 기자 recor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