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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 좌절시킨 트럼프 계산… 변화 기대 말고 대응해야[광화문에서/이정은]

입력 | 2019-11-04 03:00:00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한국의 군사 분야 기여가 언급된 미국 국방부 프레젠테이션의 슬라이드는 3번째 장(章)에 있었다. 한국이 험프리스 미군 기지 이전에 얼마나 많은 역할을 했는지 등을 보여주는 이 대목은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이 아끼는 자료였다.

“한국과 일본이 미국을 벗겨먹고 있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힐난이 터져 나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당황한 매티스 전 장관이 넘긴 다음 장은 미국의 동맹 및 파트너 현황. 미국의 전 세계 네트워크 파워를 보여주는 내용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관심이 없었다. 갑자기 “이란이 핵협정을 위반했다”며 뜬금없이 언성을 높였을 뿐.

2017년 7월 20일 워싱턴 국방부 청사에서 진행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국방부 브리핑은 이렇게 꼬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사퇴한 매티스 전 장관의 연설비서관이던 가이 스노드그래스의 저서 ‘전선 사수(Holding the Line)’에 묘사된 이 브리핑은 320쪽 분량의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다. 주요 회의와 행사에 동석해 꼼꼼하게 기록하는 연설비서관의 특성상 책에 담긴 묘사는 상세했고 정확했다.

불쑥 다른 주제를 꺼내들며 종잡을 수 없이 튄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마치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다람쥐 같았다”고 스노드그래스는 묘사했다. 50분의 브리핑이 끝날 무렵 “이건 거대한 괴물(big monster)이야. 일본…독일…한국”이라며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재차 언급한 그가 새로 꺼낸 주제는 미 독립기념일의 군사 열병식이었다.

“마크롱(프랑스 대통령)이 악수하는 거 봤나?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더라고. 7월 4일(독립기념일)은 너무 더워. 미국도 프랑스 ‘바스티유 데이’에서 한 것 같은 탱크 퍼레이드가 있으면 좋겠어. 우리는 못 하나?”

이런 대화가 반복되자 매티스 전 장관은 회의 탁상에서 몸을 뗀 채 입을 닫아버렸다. 숫자를 앞세운 트럼프식 계산법과 산만한 논의 과정에 질려버린 국방부 수장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은 최근에 달라졌을까? 불과 두 달 전인 9월 초 백악관에서 한국을 콕 찍어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는 등 그 달에만 4번 연속 비슷한 발언을 이어갔다. “동맹국들이 더 나쁘다”는 식의 주장은 2년 전과 다르지 않다. 그가 변했을 것이라는 일각의 기대는 희망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착각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잊지 않고 밀어붙이는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6개월 뒤 다시 국방부를 찾아 독립기념일 열병식 이야기를 또 꺼냈다. 결국 2019년 7월 4일 워싱턴에는 전략폭격기가 날아들고 탱크가 전시됐다.

연말로 시한이 다가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한국은 상당한 금액을 더 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그저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 유사한 난관들이 동맹 관련 사안에서 더 높은 파고로 닥쳐올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언할 ‘어른들의 축’도 사라졌다. 이럴 때일수록 희망적 사고를 버리고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 한미 동맹의 가치를 뒤늦게 알게 된 트럼프 대통령이 이제는 달라졌을 것이란 착각도 금물이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