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통계 공정성 믿어도 될까요? ‘소주성’ 효과 역행 통계 발표 후 청장 교체해 코드인사 비난 자초 비정규직 86만 명 급증 원인으로… 조사방식 변경 꼽아 논란 부채질 정권에 불리한 지표 발표 안하고 MB땐 물가 뛰자 항목서 금반지 빼 통계 선진국은 청장 임기 5∼7년… 한국은 평균 20개월마다 바뀌어
강신욱 통계청장이 지난달 2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비정규직이 86만여 명 늘어난 조사 결과에 대해 조사 방식이 바뀌었으니 이번 조사 결과와 과거 수치를 비교하지 말라고 했다. 동아일보DB
세종=김준일 경제부기자
지난해 8월 문재인 정부 초대 통계청장인 황수경 전 청장이 13개월 만에 사실상 경질되고 강신욱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보장연구실장이 신임 청장으로 임명되자 야권과 언론을 중심으로 이런 신조어가 나왔다. 정권이 ‘입맛’에 맞는 통계를 원해 청장을 바꿨다는 추정이 신조어에 담겨 있다.
지난해 10월 통계청 역사상 첫 단독 국정감사가 열렸을 때 야당 의원들은 강 청장에게 “좋은 통계로 보답할 것이냐”고 쏘아붙였다. 올 상반기(1∼6월) 통계청이 좀처럼 경기 정점 판단을 내리지 못하자 일각에서는 “정부가 추진한 경제정책이 실정(失政)으로 비칠까 봐 고의로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냐”는 주장이 나왔다. 급기야 지난달 29일 올해 비정규직이 86만 명 급증한 것이 조사 방식 변경 때문이라는 통계청장의 긴급 브리핑이 열리자 통계 논란은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됐다.
○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성적표가 된 통계
최근 통계 논란에서 공통 키워드는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정책이다. 정책의 성과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게 숫자다 보니 통계 수치가 주목받게 됐다.
지난해 8월 청와대가 통계청장을 교체한다고 밝혔을 때 그 배경에는 그해 5월 발표된 1분기(1∼3월) 가계동향조사가 있다는 말이 나왔다. 조사에 따르면 소득 1분위(소득 하위 20%) 소득은 통계 작성이 시작된 2003년 이후 가장 많이 감소했다. 소득 1분위와 5분위(상위 20%)의 소득 격차도 2003년 이후 가장 컸다. 양극화를 줄이겠다고 소주성 정책을 폈는데 의도와는 정반대 통계가 나온 것이다.
이 발표로 통계청은 여권 일각의 눈엣가시가 됐다. 조사 표본을 늘리면서 저소득층 가구가 많이 포함된 점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애초 통계청은 이 조사를 2017년 말에 폐지하려 했다. 조사응답률과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표본가구 수도 기존 8700∼9000가구에서 5500가구로 줄여놓은 상태였다.
신임 강 청장은 취임 전 1분기 가계소득 통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표본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비공개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한 전력이 있다. 강 청장 제안대로 재설계해 조사하면 지난해 1분기 1분위 가처분소득 감소 폭은 12.8%에서 2.3%로 줄어든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구미에 맞는 통계를 위해 청장을 교체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통계청 공무원노동조합마저 “좋지 않은 상황을 ‘좋지 않다’고 투명하게 절차대로 공표했음에도 마치 통계 및 통계청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왜곡하더니 결국엔 청장 교체에까지 이르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황 전 청장은 퇴임식에서 “통계가 정치적 도구가 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고 뼈 있는 말을 남겼다.
○ 쌓이고 쌓인 ‘통계 불신’
청와대는 통계청장 교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쓴 전력’이 누적되다 보니 여론은 통계청의 발표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올해 6월 통계청은 ‘경기 정점’ 판단을 유보했다. 경기 정점 판단은 정부가 언제부터 경기가 안 좋아졌는지 공식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경기 정점을 정하기 위해 통계청이 국가통계위원회에 안건을 올리는데, 이 결정이 유보된 건 처음이었다. 통계청을 주시하고 있던 야당에서는 즉시 “코드 인사의 보은 통계”, “청와대 눈치 보기”라며 공격했다. 경기가 꺾이는 시점에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소극적 재정 정책을 추진한 것이 확인되면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커질 수 있다. 이 때문에 통계청이 발표를 미룬 게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이후 통계청은 9월 한국 경제의 경기 정점을 2017년 9월로 확정했다.
통계청은 올해 8월 기준 비정규직이 1년 만에 86만여 명 증가했다고 하면서도 이는 조사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런 공식 설명을 납득할 수 없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은 통계청의 설명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데다 과거 비슷한 논란을 초래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 과거 금값 오르자 물가조사에서 금반지 빼기도
통계청 통계를 둘러싼 신뢰성 논란은 이번 정권이 처음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11월 가계금융복지조사 미공표 논란이 있었다. 당시 통계청은 정확성을 높인다며 새 지니계수를 만들었다. 지니계수는 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보여주는 지표다. 새 지니계수를 적용하면 한국의 불평등도는 더 악화된 것으로 나온다. 다가올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소득이 불평등했다는 지표가 나오면 여당 후보에게 불리할 수 있었다. 이에 청와대 압력으로 통계가 공개되지 않았다는 논란이 일었다.
2011년 11월에는 소비자물가지수 조사 대상에서 금반지가 빠졌다. 그해 1∼10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4.4% 뛴 상태여서 고물가 우려가 있던 시점이다. 금값이 가파르게 오던 때 정부는 금반지를 조사 대상에서 제외해 버렸다. 새 지수를 적용한 결과 물가상승률은 0.4%포인트 줄어든 4.0%가 됐다. ‘물가 꼼수’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5월에는 통계청이 산업활동동향 발표를 주식시장이 열리기 전 시간인 오전 7시 반에서 오후 1시 반으로 옮긴 게 문제가 됐다. 당시 통계청은 오전에 관련 통계가 발표가 되면 석간신문이 먼저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부정적인 내용을 보도해 공표 시간을 옮겼다고 했다. 그러나 생산과 해석이 엄격하게 분리돼야 한다는 통계 당국의 기본 원칙을 어겼다는 지적이 나왔다.
○ 임기 보장으로 독립성 제고한 ‘통계 선진국’
통계 논란은 정치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한국 통계청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통계청의 독립성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 통계청은 1990년 외청으로 분리된 뒤 29년 동안 17명의 청장이 거쳐 갔다. 청장이 20개월마다 바뀐 셈이다.
이와 달리 통계 선진국에선 통계청장의 임기가 정해져 있다.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라는 취지다. 호주 통계청장은 임기가 7년이고 재임할 수 있다. 네덜란드는 기본 임기 7년에 최장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캐나다는 임기가 5년으로 정해져 있다.
임기가 없어도 통계청장이 정권 교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전통을 세운 나라가 많다. 1946년 이후 현재까지 프랑스 통계청장을 거친 인물은 9명이다. 현재 프랑스 통계청장인 장뤼크 타베르니에 청장은 2012년부터 재임 중이다. 임기 중 정권이 두 번 바뀌었지만 청장은 그대로다. 독일도 1948년 이후 지금까지 11명만 통계청장을 지냈다.
한국의 통계청은 현재 기획재정부의 외청이다. 예산, 조직 증원, 법령 개정 등을 하려면 기재부를 통해야 한다.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기 힘든 구조인 셈이다. 유경준 전 통계청장(한국기술교육대 교수)은 “통계청도 식품의약품안전처처럼 청에서 처로 격상해 예산과 법령 개정 권한을 줘 독립성을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쟁이들이 통계를 이용할 뿐이다’라고 한다. 세계 12위 경제대국에서 언제까지 통계의 중립성 논란이 반복돼야 하는지 답답하다.
세종=김준일 경제부기자 ji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