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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에 1초라도 더 어필”… 예비스타 1300명의 ‘피 땀 눈물’

입력 | 2019-11-04 03:00:00


2차 오디션 안무심사에서 지원자들이 렌트의 넘버 ‘Santa Fe’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다. 앤디 세뇨르 주니어 연출은 “렌트에서는 삶, 죽음, 사랑 등 폭넓은 주제를 자유자재로 표현해야 한다. 정해진 안무보다는 자유로운 동작과 표현력을 보고 싶었다”고 했다. 신시컴퍼니 제공

앤디 세뇨르 주니어

“방금 했던 대사, 주변에 보이는 물건을 아무거나 활용해서 진짜처럼 연기해 보실래요?”

면접관의 기습 질문에 지원자의 입에선 “네?”라는 당혹감이 먼저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 상황마저도 능청스럽게 연기해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 뮤지컬 ‘렌트’의 ‘마크’ 역에 지원한 이들은 몇 초 만에 텅 빈 오디션장을 뉴욕 재개발 지역에 있는 한 낡은 다락방으로 뒤바꿔 놓는다. 방을 활보하며 둘러보던 배우들은 다시 ‘진짜’ 연기를 시작한다.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뮤지컬 ‘렌트’ 2차 공개오디션 현장. 배우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렌트’의 1막 첫 장면이 수십 번씩 재탄생하고 있었다. 한 지원자는 오디션장 창문 커튼을 들추며 대사 속 ‘로큰롤 포스터’가 있는 듯 손으로 가리켰다. “난방을 할 돈이 없어 곧 얼어 죽고 말 겁니다”라는 대사를 뱉으며 마임으로 가상의 벽난로를 표현해내는 이도 있었다. 반주자의 피아노 위에 놓인 작은 펜이나 악보 보면대도 즉석 연기소품이 됐다. 극 중 주역 ‘마크’ ‘로저’의 1막을 연기한 지원자들은 “잘 봤습니다”라는 심사위원들의 말과 함께 땀을 닦고 퇴장했다.

올해 ‘렌트’ 오디션에선 8개 주요 배역과 앙상블 총 23명을 선발하는데 1300여 명이 지원했다. 서류, 자유곡 심사를 통과한 지원자들은 2차 오디션에서 지원 배역에 따라 지정곡을 1∼4개 선보인다. 최종 3차까지 통과한 23명의 배우가 내년 6월 무대에 오른다.

‘렌트’ 오디션장에는 벽을 바라본 채 혼자 말하듯 노래하고, 목을 푸느라 고함을 치는 지원자가 유독 많다. 대사 없이 발라드, R&B, 록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로 구성된 ‘송 스루(Song-through)’ 뮤지컬이기 때문. 많은 가창으로 목도 쉽게 건조해지므로 물 한 통도 필수품이다.

“○○○번 ‘마크’, 들어오세요”라는 말에 떨지 않는 강심장이 얼마나 될까. 오디션장 안에선 연출, 음악감독, 안무감독, 기록 스태프, 반주자 등 10명의 시선이 한 명의 지원자에게 꽂힌다. 2차 오디션 심사에 참여한 앤디 세뇨르 주니어 해외 협력연출(45)은 “당신이라는 인간을 보여 달라”는 가장 어려운 주문을 내놓았다. 작품 속 에이즈, 동성애, 죽음 등 무거운 주제를 얘기하려면 겉으로 보이는 연기 기술로는 한계가 있다는 취지다.

‘자신을 보여주기 위한’ 지원자들의 자기 고백이 줄을 이었다. “제 배역 ‘마크’는 잃는 게 많은 사람”이라는 나름의 배역 분석도 내놓고, “요즘에는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만 가득한 것 같다”며 사회 이슈를 두고 토론도 벌어졌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묻는 질문에 한 남성 지원자는 “군 생활”이라고 답해 심사위원들 사이에 웃음도 터졌다.

“상대 배역과 같이 연기해 보라”는 기습 요구에 ‘마크’ ‘로저’ 역에 지원한 생면부지의 두 배우는 “어, 왔네”라는 즉흥 대사와 함께 하이파이브를 했다. “원래 친구냐”는 질문이 나올 정도로 자연스럽게 연기한 것. 한편 아쉬움이 남은 이들은 “다른 넘버도 해보겠다”며 1초라도 더 어필하려고 했으나 면접관은 “필요한 건 충분히 본 것 같다”며 돌려보냈다. 제작진은 “가능성이 보이는 배우에게 더 많은 걸 끌어내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렌트’의 무게감도 지원자들을 긴장케 한다. 1990년대 말 브로드웨이를 휩쓸고 토니상을 거머쥔 이 작품은 많은 배우가 “렌트 때문에 뮤지컬 배우가 되기로 했다”고 할 정도로 배우들의 로망으로 꼽힌다. ‘미미’ 역할에 지원한 한 배우는 “렌트는 설명이 필요 없다. 미칠 듯 무대에 서고 싶다”고 했다. “다른 곡도 해볼 수 있겠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준비가 안 됐다”며 고개를 푹 숙인 한 지원자는 “내로라하는 기성 배우들과 오디션에서 ‘렌트’ 넘버로 호흡을 맞춘 것만으로도 너무 소중하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9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남경주, 최정원, 조승우 등이 거쳐 갔다.

오디션 후 만난 앤디 세뇨르 주니어 연출은 “지원자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 게 핵심”이라며 “자신의 모습에 뭔가 더하려는 사람보다 덜어내려는 지원자에게 눈길이 갔다”고 했다. 그가 오디션 중 유독 “왜?” “어떤 상처를 받았나”라는 질문을 반복해 내면을 끌어내려 했던 이유다.

그는 1997년 ‘렌트’에서 ‘엔젤’ 역할로 데뷔한 뒤 2011년부터 연출로 나섰다. “렌트는 곧 저 자신”이라 할 만큼 애정이 깊다. 쿠바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자, 동성애자로서 미국 사회 주변부가 안고 있는 아픔을 몸소 겪었다. 원작 연출 마이클 그리프로부터 연출 지도를 받은 그는 “미국 청년들의 불안감을 그렸지만 미국보다 요즘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표현력이 풍부한 한국 배우들이 잘 소화해낼 것”이라고 했다.

매일 렌트 공연의 조각을 맞춰 나가야 하는 그에게 일정이 고되지 않으냐고 묻자 웃으며 답했다.

“삶에도 렌트에도 내일은 없어요, 오늘뿐입니다(No day, but today).”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