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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비핵화 약속의 공허한 민낯[국방 이야기/윤상호]

입력 | 2019-11-05 03:00:00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오른쪽에서 두 번째·현 국무위원장)이 2017년 9월 핵무기 병기화 사업지도현장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장착용으로 추정되는 수소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출처 노동신문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합참의장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이 일갈하듯 필자에게 건넨 말이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북한은 절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외신 보도에 대해 견해를 묻자 돌아온 답변이었다. 그는 “북한이 핵을 내려놓을 확률은 0.001%도 없다”고 잘라 말한 뒤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했다.

가장 먼저 북한이 핵에 부여한 가치를 한국과 미국이 완전히 오판했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핵은 체제 유지를 위한 협상수단이어서 ‘경제·안보 당근책’과 맞바꿀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신기루’라는 얘기였다. 되레 북한에 핵은 ‘체제 생존’의 명줄이자 목표임이 20년 넘게 실패를 거듭 중인 북-미 비핵화 협상에서 입증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이 든든한 뒷배를 자임하면서 핵무장을 용인했고, 한미가 대북 군사행동에 나설 수 없음을 경험칙으로 체득한 북한이 핵을 왜 단념하겠느냐고 그는 되물었다. 그러면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하나라도 제시해보라고 했다.

‘증거’라는 단어는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도 사용한 표현이다. 펠로시 의장은 2월 워싱턴을 방문한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단에 “지금은 말이 아닌 증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라는 단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북한이 원하는 건 비핵화가 아니라 한국의 무장해제가 아니냐”고도 했다. 실체적 근거가 결여된 채 외교적 수사로 포장된 비핵화 협상은 성공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안보만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로부터 9개월 뒤 그 예견은 현실이 됐다. 북한은 제2차 북-미 정상회담과 비핵화 실무협상을 판판이 깨뜨린 뒤 ‘새로운 계산법’을 내놓으라며 연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하노이 노딜’ 이후 사라졌던 김영철 전 통일전선부장을 전면에 내세워 “당장이라도 불과 불이 오갈 수 있다”고 위협한 것은 ‘거래조건’이 성에 안 차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재개도 각오하라는 최후통첩과 다름없다. 협상이 진행될수록 북한의 비핵화 약속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나는 형국이다.

북한이 핵을 고수할 것이라는 ‘증거’도 차고 넘친다. 지난달 원산 앞바다에서 쏴 올린 북극성-3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은 그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이다. 핵을 실은 SLBM은 사전포착과 요격이 불가능한 ‘절대 병기’다. 수소폭탄급 핵탄두(50kt 이상·1kt은 TNT 1000t의 폭발력)를 장착한 SLBM 1발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15∼20kt)을 합친 것보다 위력이 세다. 북한은 이런 SLBM을 3발가량 탑재하는 신형 잠수함의 실전 배치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북한의 핵은 양적으로도 ‘임계치’로 치닫고 있다. 현재 40∼50여 기로 추정되는 북한의 핵탄두는 내년에 100여 기까지 늘어날 것으로 미 정보당국은 예상한다. 100기 이상의 핵탄두는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향하는 ‘직행티켓’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비핵화 협상 시한을 ‘연말까지’라고 못 박은 것도 이런 계산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더 나아가 북한이 내년 초 비핵화 협상의 최종 결렬을 선언하고, 그간 쌓아둔 핵무기고를 전격 공개할 개연성도 있다. 인도, 파키스탄과 맞먹는 가공할 핵 능력을 보여주면 미국도 어쩔 도리 없이 핵군축 협상에 응할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한미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의 ‘새로운 접근법’ 운운하면서 북한의 이런 셈법을 조금이라도 수용하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런 사태가 현실로 닥치면 북핵 폐기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핵무기고를 최대한 잘게 쪼갠 뒤 주한미군 철수와 전략자산 철폐 등 미국의 대한(對韓) 방위공약과 하나씩 맞바꾸는 데 주력할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는 영영 요원해지고 우리 안보태세만 속절없이 허물어질 게 자명하다. 핵을 거머쥔 북한과의 기약도 없는 ‘밀고 당기기’는 ‘평화 만들기’가 아니라 ‘평화 구걸’과 다름없다. 북한의 선의를 맹신해 어설픈 타협으로 비핵화 협상이 유야무야되는 사태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 진의를 부단히 의심하고, 북-미 비핵화 협상의 궤도 이탈 여부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