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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봉 하나로 100인을 휘어잡은 최초의 여성

입력 | 2019-11-07 03:00:00

14일 개봉 ‘더 컨덕터’가 비춘 안토니아 브리코의 음악 인생
편견이 지배했던 20세기 초 뉴욕필 등 세계 유수 교향악단 지휘
그녀가 허문 ‘금녀의 벽’ 디딤돌 삼아 현재 마린 올솝-시몬 영 등 맹활약
‘지휘자 장한나’ 13일 국내 콘서트




여성들에게 금기의 영역이었던 지휘계에 최근 ‘우먼 파워’가 거세다. 영화 ‘더 컨덕터’에서 주인공 브리코(크리스타너 더브라윈)의 유럽 무대 활약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지면(위쪽 사진)과 지휘자 장한나, 마린 올솝, 시몬 영(아래쪽 사진 왼쪽부터). 선익필름 제공

“(음악가들을) 컨트롤하고 싶은 건가?”

지휘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영화 속 남성 지휘자 카를 무크의 말에서 보듯 수십 명에서 100명 넘는 타인에게 지시를 내리고 자신의 의지를 강제하는 행위가 여성에게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4일 개봉하는 네덜란드 영화 ‘더 컨덕터’(마리아 피터르스 감독)는 금단의 자리에 발을 디뎠던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브리코는 버클리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하고 베를린 음악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며 뉴욕 필, 베를린 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지휘한 첫 여성 지휘자였다.

영화 속의 브리코(크리스타너 더브라윈)는 여성 지휘자를 향한 수많은 편견과 맞선다. 그가 사랑한 남자도 ‘내 신부 안토니아’를 원할 뿐 지휘자의 배우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심지어 연인의 의지를 꺾기 위해 책략을 꾸민다.

영화 말미의 자막은 ‘영국 음반 전문지 그라머폰이 선정한 세계 20대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나 음악감독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세계 50대 지휘자 중에 여성은 없다’라며 아쉬움을 표한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지고 있다. 전 세계의 포디엄(지휘대)에 오르는 여성의 수는 해마다 늘어난다. ‘강요형’에서 ‘설득·화합형’으로 이상적 지휘자상이 바뀌고 있는 것도 이유다.

미국의 마린 올솝(63)은 2007년부터 미국 명문 오케스트라인 볼티모어 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성공적인 임기를 보내고 있다. 호주인 시몬 영(58)은 2013년 독일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교향곡 전집을 발매해 호평을 받았다. 2021년엔 독일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서 처음 바그너 오페라를 지휘하는 여성 지휘자가 될 예정이다.

지휘 명문 국가로 이름 높은 핀란드의 대표 악단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여성인 수산나 멜키(50)가 이끌고 있다. 캐나다의 소프라노 바버라 해니건(48)은 현대음악 전문 지휘자로도 명성을 높이고 있다. 한국의 성시연(44)은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와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거쳐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맹활약 중이다.

영화 ‘컨덕터’는 줄곧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스토리라인을 구성했지만 많은 부분은 상상에 기초한다. 여성 지휘자를 넘어 ‘여성 전문 직업인’에 대한 영화 속 1920, 30년대의 사회적 편견은 종종 과도한 설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불편하다면 이런 ‘사실’들은 어떨까. 러시아 출신 영국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는 2013년 인터뷰에서 “지휘대 위의 예쁜 여성은 연주자들이 딴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했다가 철회하느라 진땀을 뺐다. 3년 뒤엔 러시아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지휘의 본질은 힘이다. 여성은 힘이 떨어진다”고 말해 구설수에 올랐다. 실제 브리코는 수많은 ‘최초’ 기록을 세우며 1970년대까지 활동했지만 오늘날 그의 이름이 표지에 실린 음반은 목록에 남아 있지 않다.

1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지휘자 장한나’를 만날 수 있다. 신동 첼리스트를 지나 2017년부터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장한나는 이 오케스트라 첫 내한공연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과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임동혁 협연) 등을 지휘한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