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불복 후유증, 토론으로 극복… 실록 보면 답답할 정도로 회의 거듭 신하뿐 아니라 백성 의견도 존중, 貢法 만들때 전국 17만명 여론조사 백년대계는 저항 딛고 꾸준히 추진… 下三道 향리 북방이주 관철시켜 관노비 장영실-서얼 황희 등용, 개방 인사로 흙수저 전성시대 열어
‘세종 평전’을 출간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세종 대 경지 면적은 고려 말의 세 배로, 면적당 생산력은 두 가량으로 늘었으며 부자들의 탈세도 막아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면서 “상왕(上王) 태종이 주도해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한 뒤에도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마다 1만 석 가까운 쌀을 내려 왜인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우리 민주주의 제도의 큰 문제가 소수의견을 묵살하니, 소수자가 승복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후유증이 생겨요. 다수결과 투표라는 게 사실 숫자놀음이지요. 51% 찬성으로 결정했으면 반대한 49%는 잘못된 의견을 가졌던 건가요? 심지어 보통 40%대, 때로 30%대 득표를 하고도 대통령이 됩니다. 독재는 1인 독재건 다수독재건 나쁜 겁니다. ‘세종 스타일’에서 배워야 해요.”
한 교수가 말하는 ‘세종 스타일’이란, 먼저 토론과 여론을 존중하는 소통정치다. 세종의 통치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무한권력을 발동할 수 있는 군주지만, 의정부와 육조 대신이 여는 합동회의의 사회자로 머무르고자 했다. 소통의 테크닉이 절묘했다.
찬반이 엇갈려도 숫자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반대 의견을 보완하며 “실록을 읽다 보면 답답증이 날 정도”로 회의를 했다. “그러니까 신하들이 뒷말이 없고, 정책에 자신도 참여했다는 책임의식이 커지지요. 세종 재위 33년간 반역으로 죽은 이가 없습니다. 대화와 소통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를 한 덕입니다.”
신하뿐 아니라 백성들의 의견도 존중했다. 조세제도인 ‘공법(貢法)’을 만들 때는 시안을 만들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전국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라 볼 수 있다. 조사 결과 찬성이 많았는데도 바로 실시하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 먼저 시험하고 반대론자가 제기한 문제를 수정 보완해 14년 뒤 최종 결정했다. 이렇게 만든 ‘전분6등 연분9등’의 공법은 이후 수백 년간 이어졌다.
적지 않은 반대에도 새 제도를 덜컥 시행해놓고 예상됐던 부작용은 감추려 안달하고, 집권 뒤 상대 당파 숙청을 반복하는 오늘날 정치는 세종 대보다 후퇴한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에 토론이 제대로 이뤄집니까? 숫자로 밀어붙이고 국회가 의결하면 끝나지요. 반대파는 물리력으로 막으려 하고. 이게 뭡니까.”
반면 나라의 백년대계는 일시적인 원망이 있더라도 꾸준히 밀고 나갔다. 대표적인 게 충청 경상 전라 등 ‘하삼도(下三道)’ 주민의 북방 이주정책이다. 4진을 새로 설치한 함길도는 야인의 침략 등으로 인구가 적은데, 하삼도는 인구가 조밀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도 적지 않았다. 주요 이주 대상은 경제력이 있는 향리층이었다. 그러나 정책에 반발한 백성이 스스로 손을 자르거나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졌다. 세종은 “내 마음이 매우 괴롭다”면서도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하기만 하고, 장래를 생각지 아니하여 한갓 세월만 허비한다면…”이라며 이주정책을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한 교수는 “세종의 사민(徙民)과 사군육진 개척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동강-원산 북쪽은 중국 땅이었을 것”이라며 “세종은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개방적 인사정책으로 ‘흙수저의 전성시대’를 만들기도 했다. 관노비 출신으로 종3품 벼슬을 한 장영실뿐이 아니다. 24년간 정승을 지낸 황희는 서얼 출신이었고, 성균관 사성(司成)이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무당의 자식이 집현전 학사가 됐고, 아전이 종2품에 올랐으며, 노비 출신이 형조참판을 지내고, 궁궐 춤꾼의 자식이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유소년 시절 왕자 충녕(세종)을 가르친 이들의 지위가 낮았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 교수는 분석했다. 세종을 가르친 이로는 이수(1373∼1430)와 김토가 꼽힌다. 김토는 생몰연도, 본관도 모른다. 문과에 급제한 적도 없는 의관 출신이었다. 역시 평민 출신으로 보이는 황해도 봉산 사람 이수는 나중에 봉산 이씨의 시조가 됐다. 한마디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얘기다.
한 교수는 “세종처럼 노비의 인권을 보호한 임금이 없다”며 “신하들의 주장을 따랐다가, 나중에 다시 아버지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종부법’으로 바꿨다. 세종이 노비 수를 늘렸다는 주장은 사료를 제대로 보지 않아 생긴 오해”라고 말했다.
세종도 끝까지 완벽하지는 못했다. 말년에 다섯째와 일곱째 아들, 왕비 소헌왕후를 잇달아 먼저 떠나보낸 뒤에는 매우 불행했다. 불사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두고 ‘쓸모없는 유자(儒者)’라고 부르며 멸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를 알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이 세종의 비범함이었다. 재위 31년 1월에는 세종이 대신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털어놨다. “내가 기뻐하고 노여워함이…요즘에는 공사(公事)한 사이에도 발작하기를 무상하게 하고…만약 한두 해가 지나면 정신이 어두워져서 전연 모를 것으로 생각한다. 경들은 알고 있으라.”
한 교수는 “세종의 명언처럼 ‘신당기로 이일유후(身當其勞 以逸遺後·내가 고통스러운 일을 감당해 뒷사람에게 편안함을 줌)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