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들딸은 아니다. 신간 ‘씬의 아이들’에 음악 신(scene) 투신 이야기를 담은 주인공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하박국, 몬구, 김윤하, 전자양, 연진. 재미공작소 제공
임희윤 기자
#1. 이쯤 되니 혀가 근질근질하다. 자판을 치는 손가락 끝도 같이 간지럽다. 신(神)인지 신(新)인지 신(발)인지 헷갈리는 이 물 건너온 외래어를 속 시원히 ‘씬’이라 써 재끼고 싶은 거무튀튀한 욕망 탓이다. 신 이야기를 꺼낸 것은 마침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책이 나와서다. 제목부터 ‘씬의 아이들’. 출판사와 언론사에 깊게 드리운 끓어 넘치는 교열의 욕망을 저 멀리 내팽개친 출판사는 과연 어디인가. 펴낸 곳을 보니 이름값 할 법한 ‘재미공작소’다.
#2. 재미공작소는 서울 영등포구 도림로에 있다. 특수용접, 레이저 절단 같은 간판이 빼곡한 문래동 길가에 간판 하나 없이 자리한 복합문화공간. 넓이는 27m²(약 8평)쯤. 곁눈으로 봐도 큰 회사나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이세미 이재림 공동대표는 중앙대 영화학과 선후배 사이. 두 사람은 유학 시절 스쾃(squat·예술 공간 점유) 같은 급진적 운동에 영감을 받아 한국 실정에 맞는 문화공간을 상상하다 의기투합했다. 인디 음악가의 공연, 미술 전시, 각종 예술 워크숍을 열며 그들만의 ‘씬’을 이어가고 있다.
중학교 입학선물(황금색 워크맨), 불법 가요 모음집 카세트, 심야 라디오, PC통신 음악 동호회,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온 노래…. 휙 하고 지나갈 수 있는 유무형의 것들이 이 사람들을 미치게 했다. 척박한 ‘씬’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4. ‘쌍팔년도’ 일상어 사전에 따르면 그 시절 사람들은 군 면제자를 ‘신의 아들’로 불렀다. 연줄 없는 일반인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경지 말이다. 그 아들의 아버지는 속세의 어딘가에서 신처럼 군림했을 것이다. ‘신의 아들’보다 ‘씬의 아이들’이 속한 용맹한 마니아들의 삶은 때로 고달프다.
다음은 ‘씬의 아이들’ 말고 내가 아는 어른들의 이야기다. A 평론가는 가끔 거창한 직함에 비해 낮은 곳에 임한다. 어려운 장르 음악에 대해 문학적인 글을 잘 쓰지만 두 다리가 분주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지역 청소년 가요제 심사위원직을 수행하거나 취향과 신념에 맞지 않은 코멘트를 언론에 하는 식이다. 좋아하는 일만 곧이곧대로 하기에는 신이란 좁고 건조하다.
#5. 음악가 B는 꽤 잘나가는 그룹 멤버였다. 새 앨범을 내면 좋은 옷을 입고 지상파 TV 방송에도 출연할 정도로 이름도 날렸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가끔 음악 연습실에 가면 800원짜리 컵라면에 소주로 목을 축이는 그를 발견했다. 그런 형편에 그는 신자가 아니지만 교회에도 매주 나갔다. 찬양단 반주 아르바이트를 위해서다.
#7. ‘씬의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생존 증언이 반가웠다. 신에 투신한, 허우적대며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