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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에서 식량문제 해결 실마리 찾았죠”

입력 | 2019-11-08 03:00:00

‘식물세포학 대가’ 이영숙 포스텍교수




‘ABC 수송체’ 분야 세계적 학자인 이영숙 포스텍 융합생명공학부 교수는 “고요해 보이는 식물도 보이지 않는 격렬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포항=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얌전해 보이는 식물이 속에서는 어떤 동물보다 훨씬 더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세요? 살기 위해 몸속에 강한 독소를 내뿜어 가며 ‘화생방전’을 펼치고 있지요. 하지만 눈에 띄지 않아 우리는 잘 모릅니다.”

이영숙 포스텍 융합생명공학부 교수(64)의 설명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4일 경북 포항시 포스텍의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꽃대가 길고 가는 쑥부쟁이처럼 가냘픈 인상이었다. 하지만 과학에서도 응용과 상용화가 강조되는 시대에 식물의 보이지 않는 치열한 생존 투쟁을 한눈팔지 않고 30년간 연구해 온 그의 삶도 투쟁의 연속이었을 것 같았다.

이 교수는 최근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사회 공익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 여성과 가족에게 수여하는 삼성행복대상 여성창조상을 수상했다. 재단 측은 “이 교수는 ‘ABC 수송체’라는 식물세포학 분야에서만 논문 128편을 써서 1만 회 이상 인용되는 등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 교수는 사재를 출연해 여성 박사과정생의 연구를 지원하는 등 후학을 위한 활동에도 남몰래 참여하고 있다.

이 교수는 “잔잔한 식물 분야가 나와 잘 맞았기에 꾸준히 연구할 수 있었다”며 “여성 후학을 위해 장학금을 준 것도 스승인 고(故) 루스 새터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가 제게 ‘맡긴’ 돈을 다시 돌려주는 것일 뿐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유학 시절 어려움을 겪던 자신에게 ‘여성 과학자를 키우는 게 중요하다’며 남몰래 도움을 준 은사께 진 빚을 갚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돈을 갚으려고 스승의 남편을 찾아갔는데 ‘나는 모르는 일이니 못 받겠다’ 하셨다”며 “그래서 대신 나도 이공계 여성 박사과정생을 돕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의 연구실 컴퓨터 모니터 옆에는 그가 귀국하기 전인 1988년 타계한 새터 교수의 사진이 놓여 있다.

이 교수는 식물 내부에서 각종 물질을 나르는 일종의 ‘화물차’ 역할을 하는 단백질인 ABC 수송체의 유전자와 기능을 연구하는 분야의 세계적 학자다. 씨앗에 지방을 축적하게 해 곡물을 키우거나 오염물질의 축적을 막는 기능, 반대로 토양의 오염물을 흡수해 가두는 기능 등을 담당한다. 지금까지 45종의 ABC 수송체의 기능이 밝혀져 있고, 이 교수팀은 그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17종의 기능을 밝혔다.

ABC 수송체는 식물이 남몰래 벌이는 투쟁의 무기이기도 하다. 사람은 49종을 지닌 이 수송체를 식물인 애기장대는 130개나 지니고 있다. 이 교수는 “먹어서 영양분을 섭취하는 동물과 달리 식물은 단백질부터 당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야 한다”며 “이 때문에 몸 내부에는 화학 반응의 중간 산물이 가득하고, 천적에 대응하기 위해 독까지 만들어 화생방전을 펼친다. 이 과정을 담당하는 게 수송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가 ABC 수송체 연구에 뛰어든 계기는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었다. 실제로 최근까지 그는 비소나 중금속을 정화할 수 있는 수송체 관련 유전자와 비소 함량을 줄일 수 있는 유전자 등을 발견해 왔다. 식량 문제를 해결할 단초도 수송체에서 찾았다. 씨앗 내 지방 함량을 높이거나 곡물의 크기를 1.4배 이상 키울 수 있는 유전자를 발견해 관련 기술을 글로벌 식품기업에 이전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2년 뒤 정년퇴임한다.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는 “생명과학은 하나를 밝히면 새로운 의문이 다섯 개, 열 개 나오는 신비로운 분야”라면서 “어차피 내가 다 풀 수 없으니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이어 “소망이 있다면, 학생과 함께 발견한 여러 수송체를 누군가 응용해 농부들이 심고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작물로 만들면 좋겠다”며 “독소인 비소가 적게 축적되는 벼, 종자의 기름 함량이 늘어난 유채, 빨리 자라는 채소 등 응용할 게 많다”고 말했다.

“하나만 더. 제가 평생 연구했지만 ABC 수송체의 모습을 아직 못 봤어요. 이제 극저온현미경 등 기술이 발전했으니 나노 구조를 눈으로 보고 싶어요. 제가 퇴임할 때까지 못 보더라도, 함께 연구하던 다른 연구자가 밝혀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포항=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