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총선의 고전적 레퍼토리 ‘험지 출마론’의 정치학
정치인에게 지역구는 ‘캐슬(성)’이다. 차지하기도 어렵지만 빼앗기면 탈환하기가 쉽지 않다. 현역 의원들은 ‘생명선’으로 여긴다. 이 줄이 끊어지면 정치 생명이 끝날 수 있다. 국회에서 의원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튀는 발언이나 행동들을 할 때 8할은 지역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지역구는 정치인에게 각별하다.
내년 21대 총선을 5개월 앞두고 당의 지도급 인사나 중진을 겨냥한 ‘험지(險地) 출마론’이 터져 나오고 있다. 험지는 경쟁 정당의 전통적인 텃밭이나 승부를 예상하기 쉽지 않은 격전지를 말한다. 쉽게 말해 당선이 쉽지 않은 곳이다. 험지 출마 요구는 기본적으로는 기존 지역구를 포기하고 한 석이라도 더 건져 오라는 뜻이지만 여러 의미를 내포한 다목적 카드로 쓰이는 경우도 적잖다. 최근 여야를 막론하고 쏟아지는 험지 출마론의 속내를 들여다본다.
우선 험지 출마론은 당의 총선 승리를 위한 ‘적진 차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전·현직 당 대표나 인지도가 높은 인사들을 험지에 내세움으로써 바람몰이를 기대하는 것이다. 2016년 20대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의 PK(부산경남) 지역 공략법이 대표적이다. 보수세가 견고했던 ‘낙동강 벨트’를 뚫기 위해 서울에서 재선을 지낸 김영춘 후보(부산 진갑)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었던 김경수 후보(경남 김해을)를 앞세웠다.
정치적 야망이 큰 정치인들은 험지 출마를 ‘승부수’로 쓴다. 승리하면 당선증뿐만 아니라 정치적 위상 급등이라는 선물을 챙길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19대 총선 당시 대권을 기대하며 부산 사상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고, 나중에 대통령의 꿈도 이뤘다.
험지 출마론은 때로는 당내 파워 경쟁의 도구로도 쓰인다. 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는 현재 당내에서 불거진 험지 출마 요구를 자신을 정계에서 퇴출시키려는 친박(친박근혜)계의 ‘작당’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안철수 전 공동대표도 친문(친문재인) 측에서 험지 출마론이 나오자 “정치적으로 결단해야 감동을 줄 수 있는데 훈수 두듯 먼저 질러놨다. 엄청난 자해행위다”라고 강력 비판했다.
당의 전략이나 정치적 승부수 등 다양한 이유로 험지에 도전하는 이들의 생환 확률은 높지 않다. 하지만 당선과 정치적 위상 제고라는 성공을 거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발적으로 험지에 뛰어든다는 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험지 출마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나 14대 총선과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잇달아 고배를 마셨다. 이후 19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로 국회 재입성에 성공했지만 2000년 16대 총선 때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낙선했지만 끝은 아니었다. 그때 얻은 ‘바보 노무현’ 이미지는 2년 뒤 대선 가도에 큰 자산이 됐다.
민주당 김부겸 의원은 ‘TK(대구경북)판 노무현’이었다. 김 의원은 20대 총선에서 보수정당의 심장인 대구 수성갑에 승리의 깃발을 꽂았다. 경기 군포에서 3선을 지낸 그가 고향인 대구로 가 19대 총선, 2014년 지방선거에 낙선한 뒤 세 번째 도전 끝에 얻은 결실이었다. 당시 TK 출신이지만 총선을 코앞에 두고 대구에 내려온 새누리당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되레 ‘굴러온 돌’로 여겨졌을 정도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이에 대해 “전국적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거나 정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텃밭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정성을 보여주면 지역민에게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등 떠밀리듯 험지에 나섰다가 실패한 사례는 숱하다. 안대희 전 대법관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민주당 재선 의원이 있는 서울 마포갑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국민검사’로 불리며 한때 대권주자로 거론됐던 안 전 대법관은 이때의 실패로 정치의 꿈을 완전히 접었다. 그는 당초 부산 해운대에서 출마 채비를 해오다 당의 험지 출마 요구에 뒤늦게 지역구를 옮겼다. 이에 반발한 마포갑의 전직 의원이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바람에 험지 출마는 감동은커녕 당내 갈등만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내년 4·15총선을 앞두고 여야 유력 인사들은 지역구 선택을 놓고 정치적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여당인 민주당에서는 김부겸 김영춘 의원이 각각 TK와 PK에서의 재선을 노리고 있다. 중진들의 험지 출마도 야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용이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낙선하더라도 입각이나 기관장으로 ‘보은’받을 여지가 있어서다.
문제는 한국당이다. 정권을 되찾아야 하지만 대선 예비주자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대부분 원외에 있다. 한 당직자는 “험지에 나가 장렬하게 싸우는 것도 좋지만 다 전사하면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고민이 있다”고 말했다. ‘화살(의원)이 많을수록 과녁(정권 창출)을 맞힐 가능성이 높아지는 만큼 일단은 이들을 살리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현재 야당에서는 정치적 계산에 따라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꾀하는 모양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일찌감치 험지인 서울 광진을에서 표밭을 다지고 있다. 반면 홍 전 대표와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는 고향인 PK에서 출마해 여의도에 무사귀환한 뒤 훗날을 도모하는 쪽을 택했다. 김 전 지사는 “중요한 것은 총선 이후의 가능성이다. 비난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정치 신인인 황교안 대표와 김병준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대구 출마를 고려했던 김 전 비대위원장은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 정치와 당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찾겠다”고 밝혔다. 보수 통합을 추진 중인 바른미래당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변혁)’의 유승민 대표는 “내게는 현 지역구(대구 동을)가 험지”라고 말했지만 수도권 차출론이 나올 경우 응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이끈 유력 정치인들은 평가는 엇갈려도 뚜렷한 정치적 상징자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명망가 중심의 인물이 부상하면서 “당신의 정치적 능력을 보여 달라”는 당 안팎의 요구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험지 출마론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