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9화> 경남 밀양
경남 밀양시는 3·13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올해 3월 13일 복원된 밀양관아 앞에서 재연 행사를 열었다. 밀양시 제공
1919년 3월 13일 오후 7시 반, 경남 장관은 조선총독에게 이런 내용의 긴급 전보를 보냈다.(‘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 보고철’)
돈 많은 일본인들이 밀양의 만세시위 움직임을 눈치채고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이다. 조선 강점을 전후해 일본인들은 대부분 개항장을 중심으로 해안가에 많이 살았지만 내륙 지역인 밀양에 진출한 이들도 있었다. 밀양은 경부선과 경전선 철도가 지나는 교통 요충지이자 농업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경부선을 통해 부산 경성(서울) 만주로 갈 수 있었고, 경전선으로는 부산 창원뿐만 아니라 진주 순천 광주 등과 연결됐다. 특히 밀양강과 낙동강 부근의 비옥한 토지를 노리고 일본인 식민회사와 대지주들이 러일전쟁(1904∼1905년) 이전부터 밀양에 몰려들었다. 제방을 축조해 개발된 농지는 모두 일본인들 차지였다. 반일 정서가 고조되는 가운데 1906년 말 일본인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밀양일본인회가 조직화됐다.(‘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의 열혈 청년인 윤세주와 윤치형은 1919년 3월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성에 갔다가 3·1운동을 직접 체험한다. 고종의 시종을 지낸 윤세주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상경을 권유해 얻은 귀한 경험이었다. 감격과 흥분을 안고 고향에 돌아온 이들은 평소 믿고 따르던 애국지사 전홍표를 찾아가 경성에서 보고 들은 상황을 알렸다. 전홍표의 지도를 받은 윤세주와 윤치형은 밀양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모았다.
밀양아리랑시장으로 이름이 바뀐 밀양시장. 밀양=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3월 13일 날이 밝자 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에 숨긴 시위대가 장꾼을 가장해 시장 안으로 잠입했다. 오후 1시 20분경 주동자들이 태극기를 펼쳐들자 밀양시장과 밀양공립보통학교 앞 도로에 수천 명이 운집했다. 윤세주가 선언서를 낭독하는 사이 군중에게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줬다. ‘독립만세’라고 적힌 큰 깃발을 앞세운 시위대는 만세를 외치며 밀양 거리를 휘젓고 다녔고, 시위대 일부는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찾아가 종이 태극기를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일제 경찰은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과 수비대 10여 명과 함께 총검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80여 명이 현장에서 체포됐으나 주동자인 윤세주와 윤치형은 붙잡히지 않았다.
밀양 장날 시위 하루 뒤인 3월 14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말리는 교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본 주민 200여 명이 동참했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윤일선 소장은 학생들의 3·14시위에 대해 “하루 전 시위대가 교실 안에 들어와 태극기를 나눠 주는 모습에 고무된 어린 학생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라며 “비폭력 시위로 전개됐지만 5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고 말했다.
3월 20일에는 밀양의 유지 안희원의 장례 행렬을 따르던 조문객들이 밀양시장을 지날 때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일제 군경과 충돌했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로 구성된 비밀 학생단체 밀양소년단의 단원 60여 명은 4월 2일 오후 9시경 어두워진 밀양 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일제 군경은 윤태선 강덕수 박소수 등 주동 인물들을 체포해 배후를 대라며 고문했지만 학생들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독립운동사’)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사명대사를 기리는 사찰이다.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1919년 3월,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였던 한용운은 범어사와 통도사 승려와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지도했다. 그해 3월 20일 통도사 승려 5명이 단장면으로 찾아와 표충사 승려들과 비밀 회합을 가지면서 만세시위 계획이 본격화됐다. 사명대사의 항일 구국정신을 이어받은 표충사 승려들은 의지를 불태웠다.
승려들이 단장 장날 시위를 주도한 표충사. 밀양=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마침내 거사일이 밝자 표충사 승려와 학생들은 태극기를 갖고 시장 안에 잠입해 장꾼들에게 나눠줬다. 정오가 되자 평소보다 많은 5000여 명이 시장에 모였다. 30분 뒤 주동자들은 7m가 넘는 대나무 장대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적힌 깃발을 달아 시장 중앙에 높이 세웠다. 나팔소리가 울린 뒤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시위대는 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세 바퀴 돌았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일본 군경이 거만한 태도로 해산할 것을 요구하자 포위한 채 돌을 던져 유리창과 지붕 벽 등을 부쉈다. 일본군 지원 병력이 도착해 발포하면서 해산했지만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방식으로 다음 날 정오까지 만세시위와 주재소 습격을 이어갔다. 대규모 농민항쟁 성격을 띤 단장면 시위로 364명이 체포됐다.(‘독립운동사’)
밀양에서 만세운동이 잇따라 펼쳐진 데는 민족의식을 길러준 학교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항일 비밀결사 ‘의열단’ 단원들을 다수 배출한 사립 동화학교와 밀양면 시위의 중심이었던 밀양공립보통학교가 밀양 독립운동의 산실로 손꼽힌다.
독립투사들을 다수 배출한 동화학교 터. 밀양=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3·13시위 주동자 윤세주(건국훈장 독립장)와 훗날 의열단장이 된 김원봉은 동화학교가 폐교되기 전까지 전홍표의 가르침을 받았다. 동화학교에는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을 목표로 삼은 비밀 애국단체 ‘연무단’이 조직돼 있었다. 일제는 재단법인 인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1912∼1913년경 항일 민족교육기관인 동화학교를 강제 폐교시켰다. 밀양만세운동을 이끈 혐의로 일경에 쫓기던 전홍표는 무력투쟁 필요성을 강조하는 고천문(告天文)을 쓴 뒤 만주로 망명했다.(‘밀양의 독립운동사’)
일제는 3·1운동 직후 밀양시장 옆에 있던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밀양강 건너 삼문동으로 이전시키고 그 자리에 밀양경찰서를 세웠다. 조선인들이 몰려드는 시장과 학교를 분리시키고 그 중심에서 조선인들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서였다.(‘부산·울산·경남지역 항일운동과 기억의 현장’)
▼ 밀양 출신들 “무장 투쟁”… 항일 비밀결사 ‘의열단’ 주도 ▼
윤세주는 밀양 3·13시위를 주도한 뒤 중국에 망명해 의열단을 조직했다. 아래쪽 사진은 1921년 6월 8일 동아일보에 실린 밀양폭탄사건 재판 장면. 동아일보DB·국가보훈처 제공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었지만 지역적으로는 밀양 출신이 많았다. 10명 중 4명의 고향이 밀양이었다. 밀양에서 윤세주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던 김원봉이 단장으로 추대됐고, 동향 선배인 김대지와 황상규가 고문을 맡았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일보사 등 일제 통치기관들을 파괴하기 위해 조력자들이 많은 밀양과 진영에 폭탄을 숨기기로 계획했다. 1920년 3월부터 중국에서 구한 폭탄과 무기를 수수가마니 등에 숨겨 국내로 반입했지만 중간에 거사 계획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면서 같은 해 6월 핵심 단원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폭탄 압수가 밀양에서 시작됐고, 밀양을 근거지로 삼은 사실이 드러나자 일제 경찰은 이를 ‘밀양폭파사건’이라 이름 붙였다.(‘경상남도 각 시군의 3·1독립운동’)
폭탄 반입 사건이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의열단의 활동은 잇따라 성공을 거둔다. 1920년 9월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서장을 숨지게 했고, 같은 해 12월 밀양 출신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 2개를 던졌다. 당시 서장은 직원들 앞에서 훈시 중이었다.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려다 붙잡힌 최수봉은 법정에서도 당당했다. 1921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최수봉은 사형에 처한다는 재판장의 선고에도 태연하게 웃으며 퇴정했다. 이준설 밀양의열기념관 학예연구사는 “박재혁 의사와 최수봉 의사의 의거는 의열단이 폭탄 반입 사건의 실패를 딛고 재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밀양시는 11월 10일 의열단 창단 100년 기념일을 맞아 내이동 밀양의열기념관 바로 옆에 건립한 의열기념탑 제막식을 할 예정이다. 또 의열단과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들의 투쟁사를 관람객들이 가상현실로 체험하는 의열체험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
밀양=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