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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와 윤정희[횡설수설/서영아]

입력 | 2019-11-11 03:00:00


‘나를 잃는 질환’ 알츠하이머. 10여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면서 평생 쌓아온 기억과 관계와 공감들이 최근 순서부터 사라져간다. 대개 첫 3년은 시간 개념을, 다음 3년은 공간 개념을 잃고, 그 다음 3년은 사람을 못 알아보게 된다. 더 두려운 것은 종국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는 점. 타인의 평판을 중시했던 사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상상도 하기 싫은 공포의 질환이다.

▷유명인 중에 이 병에 걸렸다고 고백한 사람이 적지 않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은 1994년 담화문을 통해 발병 사실을 알렸다. “나는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행을 시작하지만 이 나라의 미래는 언제나 찬란한 여명일 것”이란 축복을 곁들였다. 말년에는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는 것도 잊고, 부인 낸시 여사도 몰라봤다고 한다. ‘벤허’의 배우 찰턴 헤스턴은 2002년 작별 기자회견을 열고 “포기하지 않겠다”고 투병 의지를 밝혔으나 2008년 사망했다.

▷흔히 ‘치매’로 불리는 알츠하이머는 노인성과 혈관성, 알코올성 등으로 나뉘고 증상에 따라 더 세세하게 분류되기도 한다. 이 중 가장 많은 노인성은 뇌의 노화 현상인지라 인간 누구에게나 온다고 한다. 발병 전에 육체적 죽음이 찾아오느냐, 아니냐에서 차이가 날 뿐이란 것. 100세 시대를 부르짖는 ‘장수’가 최근 알츠하이머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인 셈이다.

▷지난해 알츠하이머 환자가 된 89세 의사를 만난 적이 있다. 일본의 알츠하이머 분야 최고 권위자였던 그는 자신의 병을 공개하면서 환자와 가족들을 위로했다. “병에 걸렸다고 세상 끝난 게 아니더라”, “나는 여전히 나이고, 마음은 살아 있다”고 강조했다. 환자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해온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점이 가장 괴롭고 슬픈 경험이 된다며 주변의 이해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60, 7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 윤정희(75)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가족이 밝혔다. 결혼 이후 43년간 남편 백건우(73)와 잉꼬처럼 함께였던 그녀가 올봄부터 따라나서지 못했다. 파리 근교 딸의 집에서 요양 중인데, 가끔 딸도 못 알아본다고 한다. 10년 전부터 병세가 보였다니 그녀의 우아한 모습에 익숙한 대중으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 2010년 개봉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詩)’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 미자 역할을 맡았던 건 우연이었을까. 그토록 지적이고 아름답던 여배우도,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음에 인생무상을 느낀다는 탄식이 들린다. 투병 사실을 용기 내어 밝힌 가족의 뜻은 “부디 엄마를, 아내를 응원해 달라”는 호소였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