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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의 재정,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다[현장에서/주애진]

입력 | 2019-11-13 03:00:00


주애진 경제부 기자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11일 CBS 라디오방송에서 정부 재정을 ‘곳간에 쌓인 작물’에 비유하며 “그 작물들은 계속 쌓아두기만 하면 썩어버리기 마련이고 어려울 때 쓰라고 곳간에 비축해 두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12일 연합뉴스TV와의 인터뷰에서는 “글로벌 위기에서 한국 경제를 버텨내게 하려면 ‘쓸 때는 써야 한다’는 의미로 확장재정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라고 부연했다.

경기 하강기 재정 투입을 늘려 경기 회복의 마중물로 삼아야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부가 내년에 513조5000억 원 규모의 슈퍼 예산을 편성한 것은 추락하는 성장을 떠받쳐야 한다는 위기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한국에 재정을 더 풀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당장의 성장률 수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재정을 마구 당겨쓰는 것은 미래세대에 죄를 짓는 일이다. 지금은 결론이 나지 않는 재정건전성 논란에 얽매이기보다는 기업 활력을 높여 세금을 걷을 수 있는 토대를 넓혀야 할 때다. 현 정부는 2년 반 동안 법인세와 종합소득세 최고세율을 인상해 대기업과 고가 주택 보유자에게서 세금을 더 걷었지만 지속가능한 세수 확대방안은 아니다. 구조 개혁과 규제 완화로 기업이 미래 성장동력을 키우고 그 결과 이익이 늘고 세금도 더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근본 대책이다.

세수 기반을 넓히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나랏돈을 제대로 쓰는 것이다. 정부는 혁신성장을 위해 내년에 데이터, 5세대(5G) 이동통신,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인프라를 구축하고 시스템반도체, 바이오헬스, 미래차 등 미래 먹거리를 집중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분야에 투입하는 내년 예산은 올해보다 1조5000억 원 늘어난 4조7000억 원에 그친다. 반면 복지 분야에는 내년 예산 증가분의 절반인 20조6000억 원이 추가 투입된다.

기초연금을 확대하는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데도 재정을 써야 한다. 그러나 복지지출로 단기적 성과를 낼 순 있어도 민간의 활력을 끌어올리는 건 한계가 있다. 과도한 복지지출 때문에 경직성이 큰 의무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재량껏 돈을 쓸 수 있는 융통성이 줄어드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 한 경제학자는 “IMF는 재정을 풀면서 규제개혁도 같이 하라고 했는데 정부가 규제 완화, 혁신 없이 재정만 늘린다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라고 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1일 “재정 확대는 낭비가 아니라 선제적 투자”라며 “재정을 마중물 삼아 민간이 성장을 견인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내년 예산안에 성장잠재력을 높일 사업은 잘 보이지 않는다. 국회와 정부는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혈세를 정말 제대로 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주애진 경제부 기자 ja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