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신음하는 기업들]
한 화학 중소기업 대표는 13일 정부가 대표적인 환경 규제인 화관법과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규제 개선 방안을 발표하자 이렇게 반발했다. 화관법이 시행되면 화학물질을 다루는 모든 기업은 법에 맞게 공장 시설을 뜯어고쳐야 한다. 이 대표는 “정부가 이격거리 문제 보완책을 석달 전 내놨지만 영세업체는 알지도 못하고, 역시 부담이 된다. 화관법 규정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데 생업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맞추나”라며 “당장 내년에 단속이 들어오면 꼼짝없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정부가 혁신성장을 내세우며 경제 살리기에 나서겠다고 했지만 경영계는 기업 문을 닫게 할 수 있는 규제가 오히려 늘고 있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5대 그룹의 한 임원은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는커녕 경영 활동을 옥죄는 규제만 눈 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며 “정부가 말하는 경제 살리기는 공정경제만 살리겠다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나아진 부분도 있다. 화관법과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중복으로 이뤄지는 화학물질 관련 심사 중 일부를 생략하거나 통합해 현재 90일 걸리는 심사 기간을 60일로 줄인다. 한 사업장에서 각각 제출하는 장외영향평가서와 위해관리계획서를 ‘화학사고 예방관리계획서’ 하나로 합치는 방안이 포함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유연근무제 보완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 △환경안전 규제 개선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노조법 개정 전면 재검토 △최저임금법 개정 등 9개 분야 13개 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요구했다.
규제를 풀겠다는 정부의 공언과 달리 실제로는 규제가 늘고 있다. 여야 의견이 달라 국회 통과가 어려운 내용은 시행령 같은 하위법으로 규제의 강도를 더 높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 이미 시행에 들어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가법) 시행령이 대표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날 내놓은 일감 몰아주기 심사지침 제정안도 논란이 일고 있다.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은 △대기업 소속 회사 △총수 및 친족을 의미하는 특수관계인 △특수관계인이 일정 지분 이상을 보유한 회사이지만 하위법인 심사지침으로 아무 관계없는 제3자와의 거래도 조사 대상이 되게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지난해 효성그룹에서 제3자 기업을 통한 부당 일감 몰아주기 사례가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사례가 있다 해도 지침이나 시행령을 통해 사회적 논의도 없이 규제를 양산하면 안 된다”며 “일감 몰아주기 조사를 명분으로 사실상 기업의 모든 거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우려했다.
이날 서울 영등포구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 및 경영 참여 목적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 공청회에서 곽관훈 선문대 교수는 “집중투표가 가능하도록 국민연금이 기업의 정관을 고치면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상법 개정이 이미 이뤄진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참여연대 추천을 받은 이동구 법무법인 참 변호사는 “기업 경영을 방해한다는 건 엄살”이라고 했다.
재계는 “결국 정부가 찍은 총수나 등기임원을 몰아내려는 것 아닌가”라고 우려한다. 주주권 행사가 정부의 입김에 좌우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며 20명 위원 중 정부 측 인사가 6명이다. 재계 관계자는 “법으로, 국민연금으로 기업의 발목을 잡는 건 정책 입안자들이 기본적으로 기업이나 기업가의 활동을 범죄적이라 보기 때문”이라며 “기업에 대한 신뢰 없이 경제 살리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 / 세종=주애진 / 이건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