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3실장 아니라 비서실장도 탕평인사·총리 거취까지 언급하는 요란한 기자간담회 전례가 없다 ‘박근혜 청와대’ 뺨치는 권위적 행태… 차라리 노 실장이 국무총리를 하라
김순덕 대기자
“지난 2년 반은 넘어서야 할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전환의 시간이었습니다. … 함께 잘사는 나라로 가는 기반을 구축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11일 문재인 대통령)
대통령이 자기 비서실장의 기자간담회 모두발언을 다음 날 거의 그대로 따라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노 실장 발언 원고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3실장이 원팀이 되어서 무한책임의 자세로 일하겠다”는 한 대목만 빼면 대통령 말씀이라 해도 믿을 뻔했다.
그러나 정상은 아니다. 노 실장은 “탕평인사를 강화하겠다”며 인사권을 과시했고 공천권까지 쥔 것처럼 총리 거취도 언급했다. 경제 체질 개선과 전쟁 위협 없는 한반도 평화를 자부한 건 물론이다. 대통령이 이런 비서진에 둘러싸여 있으니 “국민이 변화를 확실히 체감할 때까지 일관성을 갖고 달려가겠다”고 되뇌는 것도 당연하다.
비정상(非正常)도 계속되면 무감각해진다. 청와대가 소통 강화를 위해 현 정부 들어 처음 합동간담회를 열었다지만 3실장 아니라 비서실장 단독으로도 기자들 모아놓고 정견 발표를 한 전례는 찾기 어렵다. 문 대통령이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장이던 2007년 3월 29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대통령 개헌안 4월 중 발의”를 선언했다가 2주 뒤 긴급간담회에서 사실상 철회를 밝힌 정도가 고작이다.
기자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노 실장이 취임 때 말했듯 “실장이 됐든 수석이 됐든 비서일 뿐”이어서다. 대통령비서실은 헌법에 명시된 정부기관도 못 된다. 정부조직법 14조에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기 위하여 대통령 비서실을 둔다’고 돼있을 뿐이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 때 정권의 2인자, 실세, 심지어 대통령급 실장이라고 불렸던 박지원 당시 비서실장도 “비서는 입이 없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전인 2017년 5월 4일 통합정부추진위원회를 통해 “일상적인 국정 운영은 책임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담당토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원하는 국민 뜻을 잘 알기 때문일 터다.
진보적 정치학자 박상훈은 작년 5월에 낸 책 ‘청와대 정부’에서 “대통령중심제라고 비서실이 대통령을 대신해 일하는 건 대통령 권한을 대신 행사하는 일”이라고 했다. 군주정이나 권위주의에 가깝다는 지적은 섬뜩하다.
비서실 통치, 옛날로 치면 환관 통치는 박정희 독재의 유산이다. 국회와 집권당을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시키고 대통령 뜻대로 하기 위해 비서실 역할과 위상을 극대화시킨 대통령이 박정희였다. 조국이 맡았던 민정수석 자리는 1969년 3선 개헌을 밀어붙이려고 박정희가 처음 만든 권력기관이다.
문 대통령이 진정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면 청와대가 아니라 내각과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할 것이다. 갈등과 이견은 국회를 통해서 풀어야지 청와대 행정명령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정 아쉬우면 노 실장을 총리로, 수석들을 장차관으로 임명하면 될 일이다.
그럴 능력도 자신도 없지만, 민주주의야 거꾸로 가든 말든 청와대가 혁신·포용·공정·평화의 길로 흔들림 없이 달리면 새로운 대한민국이 된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대통령 따님은 이 희망찬 나라를 떠나 동남아에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19일 열리는 ‘2019 국민과의 대화, 국민이 묻는다’에서 대통령에게 누가 좀 물어줬으면 좋겠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