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생’의 한 장면. 인생에는 희로애락이 없다. 단지 살아갈 뿐. 동아일보DB
언제나 수능이 끝나면 잘 봤다기보다는 망쳤다는 수험생이 훨씬 많아요. 잔에 절반 남은 물을 보고 “물이 반이나 남았네?” 하기보단 “물이 반밖엔 없네?” 하는 게 상처받기 위해 태어난 수험생의 영혼이기 때문이죠. 이미 지난 일인데도 우린 미련이 생겨요. 지구상 모든 동물 중 인간만이 유일하게 미래를 희망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요. 이는 인간만의 특권인 동시에 저주예요. 사실, 세상 모든 동물은 영화 ‘아저씨’ 속 원빈의 말마따나 “오늘만 사는 놈”일 뿐이죠. 개도 닭도 흑염소도 오소리도 혹뿌리맵시벌도 오로지 오늘만 살아요. 과거를 후회하지 마세요. 미래는 몰라요. 어제 수능을 망쳤다며 실의에 빠진 수험생을 위해 영화 몇 편 추천해 드릴게요.
우선, 그간 긴장감의 포로가 되어 불면증에 시달려 온 수험생을 위한 ‘수면제’ 영화. 이 작품들을 보면 미니멈 10분, 맥시멈 20분 안에 모든 시름 내려놓고 램 수면에 빠져 사흘 동안 푹 잘 수 있어요. 이름부터 졸린 미셸 공드리 감독의 제목부터 졸린 영화 ‘수면의 과학’을 추천해요.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가 옆집에 이사 온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현실과 꿈과 환상이 미친 듯이 뒤섞이죠. “마치 빅뱅 같아. 처음엔 사소했던 감정들이 대폭발로 끝나고 말았어. 아무것도 없는 내 마음에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그녀는 내 속에서 점점 커져 우주가 됐어”라는 주인공의 대사부터 영혼 가출, 망연자실해지게 만들지요.
공드리와 함께 수면용 영화계의 쌍두마차로 인정받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도 강하게 추천해요. 주인공이 자신의 꿈속의 꿈속의 꿈속의 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번 장면이 몇 번째 꿈인지도 헷갈리게 만드는 동시에 꿈마다 시간의 길이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정신줄 놓게 만드는 지적인 작품이죠.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그 10분 전, 그 10분 전, 또 그 1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메멘토’란 제목의 영화도 안 자기가 더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놀런의 초기 대표작이에요.
영화 ‘변신’도 추천할 만해요. 영화 시작 30분까지는 ‘우리나라도 이런 뛰어난 엑소시즘 영화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하며 감탄하게 만들지요.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이것저것 벌여놓은 얘기를 수습하지 못하고 결국 ‘배가 산으로 가버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어요. 운 좋게 시험 잘 본 몇몇 친구의 인생이 끝까지 잘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단 얘기죠. 200억 원을 쏟아붓고 강동원까지 출연했는데도 ‘폭망’한 작년 최악의 영화 ‘인랑’과 150억 원을 들이고 딱 17만 명이 관람하면서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망함을 현실세계에서 보여준 정지훈 주연의 ‘자전차왕 엄복동’도 위안을 주기에 충분해요. ‘잘나가는 톱스타도 한순간에 훅 가는 게 동정 없는 세상의 이치이거늘, 그깟 수능이 뭐 그리 대단할까’ 하고 자기 객관화(대치동 학원가에선 이를 ‘메타 인지’라 부른다)를 해보면서 인생과 세계를 철학적으로 보게 만드는 용기를 주니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추천해 드리는 영화는 중국 장이머우 감독의 1995년 작 ‘인생’이에요. 국공 내전, 토지개혁,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을 거치는 중국 근현대사의 광풍 속에서 하릴없이 굴곡져 가는 한 남자의 인생을 다룬 이 영화는 ‘새옹지마’의 진수를 보여주죠.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인 주인공은 도박 빚에 으리으리한 집을 잃고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데, 자기 집을 차지해 부자가 된 도박 상대는 수년 뒤 지주, 반동으로 몰려 인민재판 끝에 처형당해요. 도박 빚으로 집을 넘기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사형대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죠. 이 영화는 인생을 이렇게 정의해요. ‘인생은 기쁜 것도 슬픈 것도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그 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라고요.
수험생 여러분, 실망하지 마세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게 아니에요. 인생 자체엔 희로애락이 없어요.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이에요. 단지 살아갈 뿐이라고요.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