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BM, 지소미아 논란 거치며 대처능력 의심
老 외교관 경륜, 이제 다른 무대서 기여해야
이승헌 정치부장
필자는 최근 사건을 계기로 그에 대한 한미 외교가의 평가를 두루 접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정 실장에 대한 평가가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했다. 박수 칠 때 떠나야 한다는 게 다수였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정무적 감각이나 외교적 감수성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 한마디, 단어 철자 하나가 미칠 파장을 놓고 몇 시간씩 씨름하는 게 외교인데 이전보다 말을 너무 막 한다는 것이다. ICBM 발언이 결정적이었지만 다른 발언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표적인 게 “지소미아는 한미 동맹과 전혀 관계없다”(10일 기자간담회) 발언이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 등 일련의 미국 인사들이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지소미아 복원을 이야기한 것만 봐도, 정 실장의 이 발언은 2019년 한국의 외교안보 컨트롤타워가 했다고는 잘 믿기지 않는다.
셋째, 상황 대처능력이 이전 같지 않다. 다시 문제의 ICBM 발언 사건. 정 실장은 1일 국감에서 이 발언을 한 뒤 문 대통령을 수행해 3일 태국을 찾았다. 정 실장은 주변에 “내가 어떻게든 좀 설명하고 싶다”고 했고 5일 귀국하자마자 청와대는 작성 주체가 불분명한 보도 참고자료를 뿌렸다. 알고 보니 안보실에서 작성에 관여했는데, 지금 봐도 내용이 낯 뜨겁다. 정 실장의 ICBM 발언 논란을 가라앉히겠다며 “TEL 발사는 Transporter 운반해서 Erector 세우고, Launcher 발사까지 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운반만 하고 세운 것만으로는 TEL 발사로 규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오히려 논란을 더 키웠다. 기습 전개에 따른 신속 타격이라는 이동식 발사의 요체를 무시한, 그야말로 유체이탈 화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외교관들은 ‘의견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agree to disagree)’는 식으로 가급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표현하라고 훈련받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전직 외교관은 “복잡한 사안이 발생해도 꼬투리 잡히지 않게 대처하는 게 외교인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비핵화 대화 기조를 만들어내려 평양으로, 워싱턴으로 뛰어다닌 노(老)외교관의 그간 노력을 폄훼할 수는 없다. 다만 고단한 국가안보실장을 계속 수행하기엔 버거운 듯한 징후가 계속 감지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 실장이 그간 축적한 지혜를 발휘할 다른 기회를 빨리 찾아주는 게 본인과 문 대통령, 더 나아가 외교정책 서비스의 수혜자인 국민에게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