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상처, 쪼개진 한국 사회 광장의 절규는 활화산처럼 끓고 상대를 향한 敵意는 날카로워 인간은 다 단독으로 소중한 존재… 내면 성찰하고 이웃 어루만져야
한동일 신부·바티칸 대법원 변호사
이러한 일련의 현상 혹은 증상들 가운데 한결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다(라틴어 Beatos nos esse volumus)”는 바람일 것이다.
서기 386년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말을 하자 회중은 이구동성으로 자기들 또한 그렇다고 했다. 이에 그가 한 걸음 더 들어가 “원하는 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가?” 묻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그의 어머니는 “좋은 것을 바라고 그것을 가져야 행복하고, 나쁜 것을 바라면 비록 가져도 불행하다”고 답한다(아우구스티누스 ‘행복한 삶에 대하여’ 중).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다. 그러나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립되고 고독을 느낀다. 오늘날 광장에서 처절하게 들려오는 양극단의 목소리는 개인적, 사회적 자아가 실현되지 않음으로 인해 터져 나온 절규처럼 느껴진다. 2019년 한국 사회는 충족되지 못한 개인들이 건축해낸 각자의 ‘정의’들로 인해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터질 듯이 뜨겁다.
인간은 개인적, 사회적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도 한낱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개인적, 사회적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을까. 거대하고 휘황한 현대 문명은 우리를 저마다의 인격과 이상을 지닌 인간의 지위에서 끌어내려 무수한 소비자이자 무지한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시키려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단독하고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가끔 인간의 눈이 손끝에 붙어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가끔은 내가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도 있을 텐데, 인간의 눈은 얼굴에 붙박여 있어서 구조적으로 늘 상대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기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명상’이라고 하는데, 그 명칭이야 어떻든 간에 스스로의 내면과 세계에 조화로운 질서를 만들려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마음을 가다듬어 자신에게 집중하며 자기 자신 안에 마음을 붙들어 두어야 한다.
단 하나의 진영에 몸담고 내 편이 아닌 다른 편에 속한 자의 이야기는 가혹하게 비판하고 적대시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나 자신보다는 상대의 허물만을 바라보려 한다. 내가 아닌 타자에게, 우리 진영이 아닌 상대 진영의 사람에게 쏠려 있는 나의 눈과 마음을 돌려 스스로에게 집중해야 한다. 오직 그 길만이 내 안에 있는 보잘것없음과 우리 사회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동시에 발견하고, 나 역시 보잘것없는 전체의 일부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나의 아집을 넘어 우리를 향해 가 닿는 방법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터지려고 하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고도의 이론이나 정책이 아니라 그간 우리가 유치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넘긴 원칙에 대하여 재확인하고 그것을 지키도록 노력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그때 우리의 보잘것없음으로 일어나는 통증은 더 이상 보잘것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동일 신부·바티칸 대법원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