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빠’를 제외한 국민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 나라가 북한이 원하는 대로 가고 있다는 거다.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2019 국민과의 대화’에서 남북관계가 보람스럽고 전쟁 위협도 제거됐다고 했지만 다수 국민에겐 그렇지 않다.
정부가 9·19 남북군사합의로 무장해제를 하는 사이, 북은 핵 폐기는커녕 우리 요격미사일로도 못 막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신종 단거리 탄도미사일까지 게임 체인저 3종 세트를 완성했다.
한 국가의 파워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전략이 전쟁 아니면 공갈이다. 북에서 한번 공갈을 치면 이 정부는 설설 긴다. 남북 권력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23일 0시 지소미아(GSOMIA·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에 이어 자칫하면 북의 수십 년 숙원사업인 주한미군 철수까지 실현될 조짐이다.
그 맨 앞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헷갈리지 말기 바란다. 국가안보실장이 국방·외교·통일·행정안전부 장관 역할을 합친 듯한 역할을 해서 엄청 높아 뵈지만 헌법기구인 NSC와 달리 국가안보실은 대통령비서실의 한 조직이다. NSC 의장인 대통령은 회의를 소집하고 주재하며 국무총리로 하여금 그 직무를 대행하게 할 수 있지만 비서인 정의용은 NSC회의에서 위임한 사안을 처리하는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일 뿐이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동아일보DB
작년 3월 6일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와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국민 앞에 밝힌 사람이 정의용이었다. 북측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고 보고한 거다.
작년 4월 진행 예정이던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해서도 김정은이 “예년 수준으로 진행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정의용은 강조를 했다. 이 대목은 특히 중요하다. 최근 북이 한미연합공중훈련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미국이 연기를 발표했는데도 19일엔 완전 중단까지 요구했기 때문이다.
● 정의용수첩 메모, 김정은 발언 맞나
김정은과 면담 당시 정의용이 펼쳐놓은 수첩이 수상하다. 그가 귀국하기 전 사진으로 먼저 공개된 수첩엔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미 연합훈련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단절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김정은이 한미훈련을 반대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할 수밖에 없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해 3월 5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의 회담 도중 작성한 메모 일부. 사진 출처 노동신문
그 밑에는 ‘또 한번의 결단으로 이 고비를 극복 기대’라는 메모가 있다. 김정은이 “4월 한미훈련을 앞두고 있지만 또 한번 결단을 내려 이 고비를 극복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메모다.
●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도 못 믿는다
정의용은 귀국보고에서 그 메모가 김정은의 말이 아니라고 극구 강조를 했다. 김정은과 면담할 때, 한미훈련 문제가 제기될 경우 남북관계가 단절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설득해야겠다 싶어 자신이 적어놨다는 거다. 그렇다면 왜 북이 이제 와서 미-북 비핵화 협상 조건으로 한미훈련 완전 중지를 요구하는지 말이 안 된다.
그 말이 거짓이라면 정의용이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밝힌 것도 의심스러워진다. 외교관 출신인 그가 단어 하나하나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다. 김정은이 핵포기를 한다는 발언은 없다는 데 전문가들도 주목을 했다.
북에서 주장하는 ‘한반도 비핵화’란 북에 있는 핵무기를 폐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한미군 철수는 물론 한반도 핵우산 보장 철회, 일본과 괌에 있는 미국의 핵무기 철수까지 거의 무한대의 범위다. 북은 자기네를 불안케 하는 이런 위협 요소가 다 사라져야 핵을 가질 이유가 없어진다고 명백히 밝힌 셈이다.
정의용이 방북 결과를 설명한다며 미 백악관에서 가진 브리핑 내용은 이와 다르다. “저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언급하였다고 하였습니다(I told President Trump that, in our meeting, 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said he is committed to denuclearization).”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해 3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외교관들은 ‘commit’ 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다. 트럼프로선 김정은이 자기 입으로 ‘북한 비핵화’를 책임질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브리핑이다. 정의용이 대한민국 국민 앞에서와 미국 대통령 앞에서 다른 말을 한 것이다. 둘 중에 하나는 속았다고 할 수 있다.
정의용이 문 대통령에게도 거짓을 보고하진 않았을 것이다. 국민에게 한 말과 똑같이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전했다면, 문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는 물론 그 이상까지 예상하고 뚜벅뚜벅 수순을 밟아가는 것일 수 있다.
● 북은 ‘왜놈들과 협정’ 지소미아 반대했다
북이 한미동맹 만큼 싫어하고 겁내는 것이 한미일 안보 공조다. 2012년 지소미아 체결 직전까지 갔을 때는 “이명박 친일친미 정권이 기어이 미제의 압제에 홀려서 우리 민족의 불구대천과도 같은 원수의 나라인 왜놈들과 협정을 맺은 것은 공화국과 인민들을 기만하고 침략행위 앞에 굴복당한 것”이라고 우리민족끼리 사이트를 통해 격하게 비난했다.
지소미아가 파기되면 주한 미군이 위험해지고 한미동맹 역시 위태로워진다는 우려가 한미 양국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북이 원하는 길이기에 청와대는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그래서 국민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1년 8개월 전 북측에 핵 폐기 의지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여기까지 밀고 온 정의용이 의심스러워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연 정의용은 정직한 대통령특사였는가. 지나친 애국심이나 충성, 또는 고희(古稀)를 넘겨 올라앉은 고위직에 눈멀어 세상을 속인 건 아니었는가.
● 대통령 책임인가, 비서의 잘못인가
국민이 뽑은 국회가 있고, 인사 청문회를 거친(물론 다 경과보고서 채택을 받진 못했다) 장관들이 존재하는데 대통령비서실이 입법·사법·행정의 상위에서, 국방·외교·안보·통일 정책까지 주도하는 것은 정상적 민주정부랄 수 없다. 민주주의의 요건인 ‘책임정치’에 어긋난다.
명나라 때 황제의 명에 따라 대규모 해상 원정에 나섰던 정화는 환관이었다. 대통령의 명에 따라 김정은을 만나 오늘의 단초를 만든 정의용도 결국 대통령비서다. 그래도 경제난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견딜 수 있겠지만 당장 안보에서 ‘환관 통치’의 독(毒)이 퍼지는 형국이다. “지소미아와 한미동맹은 별개”라며 대통령과 국민을 오도하는 정의용의 난리(亂理·도리를 어지럽힘)를 통해.
비서의 잘못된 보고 때문인지, 비서가 대통령에 맞추느라 이 지경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다 10~20년 후에도 대한민국이 자유민주 체제로 존재할지 불안해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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