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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금강산 너절하다”… 이게 남쪽의 책임인가[광화문에서/황인찬]

입력 | 2019-11-22 03:00:00


황인찬 정치부 차장

사실 낡긴 낡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너절하다”고 했던 금강산 내 시설 얘기다.

지난해 이산가족 상봉 취재를 위해 찾은 금강산 관광지구 시설물들은 빛바래고 남루했다. 임시 식당으로 사용된 온정각 앞 나무 덱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발이 빠질까 조심해야 했다. 작별 상봉장인 금강산호텔 외벽은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곰팡이가 슬어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도로엔 깨진 콘크리트 조각이 나뒹굴었다.

상봉을 앞두고 급히 보수된 이산가족면회소 1, 2층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그러나 비상구 계단엔 곰팡이 냄새도 났다. 지하에 차 있던 오물은 퍼냈지만 아래서 올라오는 썩은 내는 감추지 못한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20년, 남한 관광객의 발길이 끊긴 지 10년 남짓 되면서 시설들은 그렇게 흉물처럼 변해 있었다.

김정은의 역정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는 남측 시설물을 “싹 들어내라”고 했다. 이런 북한 태도가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김정은은 지난달 백마를 타고 백두산을 오른 뒤 ‘웅대한 작전’을 예고했는데 북한 매체들은 금강산 시설 철거 및 북한식 재개발을 ‘웅대한 조치’로 선전하고 있다.

정부는 금강산 내 남한 시설을 철거하겠다는 김정은의 결정에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지만 북한은 거부하고 있다. 철거 관련 최후통첩장까지 보낸 상황이다. 대미 압박을 위해 금강산 시설물 일부를 전격 철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도 관가에선 나온다. 이렇듯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반면 남북 간 협의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협상 과정을 비공개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협상 과정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하지만 지난해 남북 교류 과정을 상세히 공개했던 정부가 정체 국면이 되자 대북 정보에 입을 다물었다는 말도 나온다.

이제라도 정부가 금강산과 관련해 명확히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 있다. 시설 노후화와 관련된 책임이 남과 북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북한은 우리가 미국 눈치를 보면서 사업을 재개하지 않아 막대한 손해까지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측 시설 철거 시 우리의 보상 요구를 외면하려고 분위기 조성에 나선 셈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시설 노후화의 원인인 금강산 관광 중단은 엄연히 북한 책임이다. 금강산 관광은 2008년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 사건으로 중단됐다. 이후에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인한 국제사회의 우려와 대북 제재로 재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허나 정부 어느 곳에서도 이런 지적을 듣긴 힘들다. 이런 가운데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워싱턴에 가서 “변화된 조건과 환경을 고려하면서 금강산 관광 재개와 활성화를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현대아산은 금강산에 사업권 대가와 시설 투자를 합해 모두 7670억 원을 투자했고 정부도 598억6000만 원을 투입한 상황이다. 그러나 북한은 “자격을 상실했다”며 남한의 금강산 권리를 부인하고 있다. 정부는 우리 기업인의 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세금을 헛되이 썼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에 관광 중단과 시설물 노후의 책임을 따져야 한다. 관광 재개 논의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황인찬 정치부 차장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