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비건 지명자의 답변은 인상적이었다. 3시간 동안 탄핵은 물론이고 주요 외교안보 정책을 두루 다룬 청문회 내내 그는 송곳 질문들을 능숙하게 받아냈다. “판단을 피해가지 않겠다”며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고, 민감한 내용에도 좀처럼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다. 여야 위원들에게서 모두 “답변에 동의한다”, “통찰력 있는 설명이었다”는 추임새가 나왔다.
그런 그가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과 관련된 질문에 ‘무임승차’를 언급한 것은 의외였다. 한국이 무임승차자가 아니라는 것은 워싱턴 싱크탱크와 의회 인사들도 줄곧 지적해온 내용 아니었던가. 더구나 비건 지명자는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로 수없이 한국을 오가면서 한국의 정관계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만나왔다. 한국의 군사 분야 기여도를 모를 리 없다. 청문회를 지켜보던 한국 외교관들 사이에서 “비건 당신마저…”라는 탄식이 나왔다.
밑도 끝도 없이 5배로 증액하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는 황당하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똑똑하고 유능한 참모들에 의해 논리의 옷을 입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비건 같은 고위 당국자들이 지원할 것이다. 참모들은 결국 대장의 지시를 이행할 수밖에 없다. 설사 이들이 반대 입장으로 대통령을 설득하려고 해도 최종 결정권은 결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다는 점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그가 지시하면 대북제재가 철회되고, 국방부 대변인이 “예정대로 진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공언한 한미 연합 공중훈련도 불과 보름 뒤 중단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올해 초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끈끈한 동맹인데 한미 균열을 이야기하느냐”고 손사래를 치던 미 국방부 관계자는 기자에게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이 미국의 정책과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니 걱정 말라”던 귀띔도 이제는 없다. 실무 의견이나 정책 방향이 한순간에 뒤집어지는 것을 그도 여러 번 경험한 탓일 거다.
동맹을 가치가 아닌 돈으로 따지는 ‘트럼프식 동맹관’은 이제 트위터와 유세 현장의 수사(修辭)를 넘어 실제 정책으로 넘어오고 있다. 시리아 주둔 미군 철군에서 봤듯이 집권 초부터 주한미군 감축을 염두에 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외교안보뿐 아니라 경제, 정보 공유 등 다른 분야에서도 지금껏 경험한 적이 없던 충돌 가능성이 있다. 현재 워싱턴에선 동맹 간 공동의 가치와 신의 얘기는 마냥 순진하게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