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 부는 ‘봉준호 팬덤’ “특유의 유머로 푼 계급갈등… 북미 관객에 카타르시스 선물” 올해 외국어영화 수입 1위… ‘제시카 징글’ 벨소리로 인기 패러디-짜파구리 인증샷 열풍… 변방의 영화 아닌 문화현상 우뚝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기대 묻자… 봉감독 “지역 축제일뿐” 언급 화제
봉준호 감독이 배우 박소담과 함께 지난달 3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영화 ‘기생충’ 상영회에 참석했다. LA 한국문화원 제공
이서현 문화부 기자
올해 5월 프랑스 칸을 집어삼킨 기생충은 이제 북미 대륙을 장악하고 있다. 22일 기준 북미 수입 약 1442만 달러(약 170억 원)로 올해 북미에서 개봉한 외국어 영화 중 최고 수입을 올렸다. 상영관 수도 600여 개에 이른다. 기생충 이전의 1위는 올해 3월 개봉해 927만 달러를 벌어들인 코미디 영화 ‘노 만체스 프리다 2’다. 역대 외국어 영화 흥행 1위인 리안(李安) 감독의 ‘와호장룡’(1억2800만 달러)이나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5700만 달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할리우드 거장 감독 및 배우들의 호평과 일반 관객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쏟아내는 열광적인 반응은 역대 한국 영화가 누리지 못한 현상이다.
○ 할리우드는 지금 #bonghive
미국 관객들은 영화 속 한우를 넣은 ‘짜파구리’를 따라 만들거나 기정(박소담)이 부른 노래를 패러디하는 등 적극적으로 기생충을 즐기고 있다. LA 한국문화원 제공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 네온은 발 빠르게 홈페이지에 휴대전화 벨소리로 이 노래를 내려받을 수 있는 링크를 게시했고, 배우 박소담은 이 노래를 가르쳐주는 동영상을 SNS에 게시했다. 인터넷에는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라는 가사를 담은 머그잔과 티셔츠 등 갖가지 패러디 상품까지 등장했다.
봉준호 감독의 열성 팬덤을 뜻하는 ‘#봉하이브(hive·벌집)’라는 해시태그에는 ‘제시카 징글’뿐만 아니라 핼러윈을 맞아 기생충의 주요 장면을 패러디하거나 영화에 등장하는 한우 토핑을 넣은 ‘짜파구리’를 만든 인증샷을 공유한다. 기생충이란 콘텐츠가 변방의 영화가 아닌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이다.
박위진 LA 한국문화원장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관람했다는 사람들도 있다”며 기생충의 프로모션으로 만난 북미 영화계 관계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전했다. 박 원장은 “‘스토리가 탄탄하고 기발하다. 미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의견이 많다’는 반응이 나왔다. 사회갈등과 빈부격차는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영화를 풀어가는 과정이 너무나 재미있었다고 한다. 등장인물 중 ‘누가 나쁜 사람이냐. 사회가 만들어낸 악인들 아니냐’며 서로 논쟁하는 모습도 흥미롭다”고 전했다.
○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카타르시스 선사
배급사 네온의 톰 퀸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가 ‘위층-아래층’에 관한 이야기라고 묘사하지만 이 영화에는 악당도, 무고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이가 기생충이다. 우리는 결국 모두 자본주의 안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코믹스 영화로는 처음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조커’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과도 맞닿아 있다. ‘조커’는 R등급(만 17세 미만이 영화를 관람할 때 보호자를 동반해야 하는 등급) 영화로는 처음으로 전 세계 흥행 수입 10억 달러(약 1조1800억 원)를 돌파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계급 갈등은 오랜 기간 영화의 주제였지만 기생충은 특유의 유머감각을 지닌 영화”라며 “칸 영화제 현장에서도 관객들이 국적에 관계없이 기생충의 유머감각과 시니컬함에 열광했는데, 북미 관객들도 같은 맥락에서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랜 기간 축적된 한류의 저변에 종합예술로서 한국 영화가 제대로 평가받았다는 의견도 있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영화지만 그동안 북미에서 K팝과 K드라마, K뷰티 등 한국 문화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관객들이 한국 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운 타 문화권의 영화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 미국 대선 못지않은 캠페인전
기생충은 10월 개봉을 시작으로 ‘오스카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내년 2월 9일 열리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각 배급사의 ‘어워드 팀’이 본격적으로 프로모션 활동에 돌입했다.
1929년 시작된 아카데미상의 수상작 선정 방식은 복잡하기로 악명 높다. 전 세계에서 8000명 안팎의 아카데미 회원의 투표를 거쳐 작품상, 감독상 등 24개 부문에서 시상한다. 영화 제작에 직접 참여한 제작자, 감독, 배우 등이 해당 부문에 투표한다. 아카데미상 선정 방식을 설명한 규정집만 A4용지로 35쪽에 이른다. 투표권을 가진 봉 감독조차 “아카데미 수상작 선정 방식은 너무나 복잡하다. 예측하기도 어렵지 않냐”고 반문할 정도다.
올해는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명칭을 ‘국제영화상(Best International Feature)’으로 바꾸고 심사 규칙도 변경해 기생충의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다. 지난해까지는 100개 가까이 올라오는 각국 출품작 가운데 아카데미 회원 투표를 통해 1차로 예비 후보 10편을 정한 뒤 내부 심의를 통해 최종 후보를 5편으로 압축했다. 그러나 올해부터 예비 후보 10편이 정해지면 아카데미 회원들이 스트리밍으로 작품을 감상한 후 투표해 최종 5편을 정하도록 심사 방식을 바꿨다. 후보작들은 미국 내 주요 도시의 극장에서 상영하고 아카데미 회원 전용 사이트에서 스트리밍한다. 작품을 볼 수 있는 장소의 제약이 사라지면서 아카데미 회원들의 참여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에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외국어영화상 예비 후보 10편에 들어갔지만 최종 후보 5편에서는 탈락했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가 최종 수상작이 됐다. 할리우드 영화 매체의 보도를 종합하면 기생충은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국제영화상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가고 작품상 후보까지 넘볼 수 있다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올해 국제영화상 부문에는 93개국의 영화가 출품됐다. 외신들이 유력 후보로 예측하는 작품은 기생충과 함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페인 앤드 글로리’, 세네갈계 출신 마티 디오프 감독의 ‘아틀란틱스’ 등이다.
수년간 ‘백인들만의 오스카(#Oscars so white)’라는 비판을 받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어떤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지에 대한 기대도 크다.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를 둘러싼 설왕설래에도 정작 봉 감독은 한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오스카는 국제영화제가 아니잖아요. 지역의(local) 축제지요”라고 언급해 화제가 됐다. 미국인들조차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테마 파크’라는 두 단어로 마블을 날려 버렸다면 봉 감독은 단 한 단어(local)로 콧대 높은 오스카의 권위를 날려 버렸다며 통쾌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기생충은 칸 뤼미에르 대극장에 이어 내년 2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돌비 시어터까지 집어삼킬 수 있을까. 봉 감독의 발언처럼 아카데미는 세계적인 시상식이지만 분명 미국의, 아직은 백인 남성 중심의 잔치다.
그럼에도 기생충의 아카데미 후보 지명으로 전 세계 더 많은 사람이 한국 영화에 새로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한국 영화 100년을 맞은 올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서현 문화부 기자 baltika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