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역사에서 파란만장한 평가를 받은 왕이다. 과거에는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인목대비)를 쫓아낸 패륜아에 무능력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다가 내정은 몰라도 외교의 공헌은 인정해야 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명청 교체기에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함으로써 극단적인 배금정책을 펴다가 정묘, 병자호란을 야기한 인조 때의 비극은 막았다는 것이다.
이 중립외교의 대표적인 사건이 사르후 전투에서 보인 조선군의 이중행각이다. 후금이 명을 공격하자 명나라는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준비한다. 이때 조선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파병을 요청한다. 조선은 명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1만이 넘는 군대를 파병하지만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내 후금과 내통해 조명 연합군의 진로를 알려주게 하고, 전투가 벌어지자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실록에는 이 사실을 증언하는 기록도 있지만, 밀지항복설은 원래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광해를 몰아내는 명분으로 유포한 것이다. 인목대비 폐위와 명에 대한 배신은 모두 삼강오륜을 어긴 패륜행위였다는 것이다. 한 사관은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 적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광해군이 파병을 걱정하는 내용, 명의 군대는 분명히 패배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발언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덕분에 후대 학자들이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단, 학계는 대체로 밀지항복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중립외교라는 말도 적절치는 않다. 두 강대국이 상반된 요구를 해올 때 중립외교라는 것이 가능할까? 한쪽의 말을 들으면 한쪽이 미워하고, 두 쪽의 말을 다 거절하면 양쪽의 핍박을 받는다. 정의를 지키고 우리에게 실리가 되는 선택을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약소국에겐 그 선택이 제한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르후의 비보가 전해진 다음에 광해군은 이렇게 한탄했다. “고상한 말이 나라를 경영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